2018년 4월 24일 화요일

바다 같고 태산 같으신 분 / 전주석

바다 같고 태산 같으신 분


전주석 목사(인천노회 공로목사)

나를 한국신학대학으로 이끌어 주심

6․25 사변이 터졌을 때 나는 전북 군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당시 예수교장로회와 기독교장로회로 분열되지는 않았지만 교회나 노회에서 아주 첨예하게 대립을 하였을 때였다. 내가 다니는 군산 동부교회의 담임목사는 예장편이였으나 장로들은 조선신학교 노선에 가까운 분들이 많았다. 예장 쪽에는 총회장을 지낸 이자익 목사를 위시해서 김현정 목사가 있었고 기장 쪽에는 장하원 목사와 이상규 목사들이 있어서 전국 어느 노회보다 격렬한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동부교회에서 부흥사경회를 가지면서 강사로 서울 신암교회 고 안병부 목사님을 모셨다. 안 목사님은 키도 크고 인물이 아주 잘 생겼을 뿐만 아니라 언변도 좋고 성경과 신학일반 그리고 상식에 대해서까지 대단히 박식한 분으로 카리스마가 있었던 분이었다. 당시 지교회 안에서까지 김재준 목사님의 신학에 대해서, 또 한국신학대학에 대해서 왈가왈부한 때였기 때문에 강사에게 당시 논단 되었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집중적인 질의 응답을 하였다. 지금 기억으로는 당시 동부교회 장로들이 축자영감설, 목적영감설등에 대해서 물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겨울방학 중이어서 집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관심 있게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 강사로부터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았었다.

강사이신 고 안병부 목사님은 모든 질문에 대해서 조금도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어 그러면서도 명쾌하게 답변을 주었다. 실상 동부교회 장로들은 신학적으로 조선신학교 노선에 가깝기 때문에 부흥회 강사로 안병부 목사를 모셨고 강사를 통해서 자기들의 생각이 옳다는 확신을 얻고자 한 듯이 아닌가 생각된다. 질의 응답 중에 강사는 한국신학대학의 김재준 목사님에 대해서 굉장한 존경과 경의를 표하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는 마치 세례요한이 장차 오실 예수를 가르쳐 그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한다는 뜻의 말로써 장공 선생님을 높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나는 고등학생으로 진로를 생각하면서 고민하던 때였는데 나의 가슴에 ‘내가 만일 신학교에 간다면 나는 한국신학대학이다. 안병부 목사님이 저렇게 훌륭하신 분인데 안 목사님이 존경하는 김재준 목사님은 얼마나 훌륭할까’ 하는 마음으로 한 번도 뵙지 못한 김재준 목사님에 대한 흠모하는 마음과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니 장공 선생님께서 나를 한국신학대학으로 이끌어 주신 것이라 생각된다.

약한 자를 붙들어 주신 선생님

6․25 전란 중에 한국신학대학이 부산으로 피난하여 남부민동에 가교사를 마련하여 학생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군산노회(예장과 기장으로 갈라지기 전) 목사후보생 시험에 합격한 다음 부산에 내려가서 시험을 치렀다.

학과시험을 마치고 구두시험 때였다. 그처럼 마음속으로 존경하던 김재준 목사님이라고 뵙고 첫 인상에서는 약간 실망을 느꼈지만 존경하는 분 앞에 서서 면접을 하게 되니 가슴이 벅찼었다. 장공 선생님은 책상 위에 놓여있는 서류들을 잠시 보시더니 나에게 “너는 무엇을 좋아 하나?” 하고 물으셨다. 나는 서슴지 않고 “예, 저는 문학을 좋아합니다” 라고 대답을 하였더니 선생님께서는 그 인자한 얼굴에 특유한 미소를 지으시면서 “그러면 소설을 써보지!” 하는 말씀이었다. 그러고는 더 이상 물으시는 말씀이 없이 잘 해보라 하시면서 나가라고 하셨다. 너무나도 싱거워서 면접을 맞추고 나와서 함께 온 친구에게 너에게는 무엇을 묻더냐고 물어 보기까지 한 기억이 있다. 당시 나는 문학을 몹시 좋아해서 일본어로 된 소설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었다. 그때에 읽은 책 가운데 「풀르타크 영웅전」 전4권을 비롯해서 일본사람이 쓴 「삼국지」 그리고 세계명작소설을 읽었으며 우리 나라 작가로는 박계주씨의 「순애보」 등을 읽었다. 나는 소설을 많이 읽으면서도 내가 소설을 쓴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차에 장공 선생님이 ‘소설을 좋아하면 소설을 써 보라’는 말씀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소설은 특별한 사람만이 쓰는 줄 알았는데 나보고 장공 선생이 소설을 써보라고 하셨으니 나 같은 사람에게도 소설을 쓸 가능성을 보신 것일까? 나는 장공 선생님의 그 한마디 말씀에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를 얻었는지 모른다. 그후 나는 소설로는 한 발자국도 더 나가지는 못했지만 장공 선생님의 말씀은 잊을 수가 없다.

다음으로 장공 선생님의 사모님을 처음 뵙고 대단히 송구스러운 말이지만 실망을 하였다. 당시 장공 선생님은 온 가족이 부산 남부민동 언덕에서 고달픈 피난생활을 하시던 때였다. 나는 장공 선생님처럼 훌륭하시고 일본유학, 미국 유학까지 하신 분이니 사모님 또한 인품이 빼어난 미인이라고 생각했다가 막상 사모님을 뵈니 키는 크고 꼭 시골 아주머니 같은 인상이어서 속으로 ‘김재준 목사님도 불쌍하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미숙하고 어리석은 자의 생각이며 ‘사람을 외모로 판단치 말라’ 하신 예수님의 교훈을 정면으로 어긴 불경스러운 생각이었지만 당시 내가 가졌던 생각임을 밝히고자 한다. 장공 선생님께서 「범용기」 속에서 사모님께 대한 따뜻하고 깊은 애정을 가지고 두 분이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셨음을 밝혀 주고 있다. 사모님은 그 어려웠던 시절 경제생활에 무능하신 장공 선생님을 내조하셨고 자녀들을 키우시고 교육시키시고 집안 모든 일을 잘 감당하신 이 땅의 현모양처의 귀감이 되신 분이었다.

모든 제자들을 포용하신 선생님

내가 신학교에 입학하자 어느 날 김재준 목사님의 특강이 강단에서 있다 하으로 학생들이 강단에 모였다. 이때 장공 선생님께서 무슨 제목으로 말씀하셨는지 제목은 기억되지 않았지만 나의 평생에 잊지 모살 두 가지 사실을 지금도 내 가슴속에 깊이 박혀있다. 「세계와 선교」 제132호 “나의 설교분석”에서도 언급했지만 여기에 다시 소개한다.

첫 번째 말씀은 너희가 목회를 시작하여 10년쯤 지나면 데드 라인(Dead Line)에 걸리게 되어 목회생명을 잃고 목회에 실패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기도와 명상, 성경과 독서 거기에 인생이 풍부한 경험 등이 합하여 원숙한 목회를 하는 사람은 이 데드 라인을 뛰어 넘어 더욱 훌륭한 목회를 할 수 있다. 너희들은 앞으로 이 데드 라인을 넘어서 목회의 성공자가 되라는 말씀이었다. 이때 나는 데드라인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으나 후에 군목이 되어서 군에 복무할 때 이 데드 라인이라는 말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그것은 자동차가 고장이 나서 폐차가 되어 세워진 차를 데드 라인에 걸렸다고 하였는데 장공 선생님은 목사의 목회생명을 데드 라인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셨음을 오랜 후에 알 수 있었다.

두 번째 말씀은 장공 선생님께서 자신이 목사가 되신 동기와 지금까지 목사로서 일하시는 삶의 모티브를 솔직히 말씀하였다. 장공 선생님은 목사가 되려고 하여서 목사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목사 되도록 몰아 넣으셨고 지금도 이 일을 하도록 하시기 때문에 나는 할 따름이요 앞으로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나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 목사가 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졸업반 때 6ㆍ25 사변이 터졌고 전쟁으로 인해 또 인민군들과 빨갱이들로 인하여 많은 양민이 죽고 상하고 온 세계가 뒤죽박죽이 된 상황에서 나의 인생관이 바뀌게 되면서 신학교에 들어가는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였고 더욱이 담임선생이며 진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조명호 선생님께서 나에게 여러 번 신학교에 진학할 것을 권면해 주셨다. 처음에는 신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항변하다가 결국 졸업 한달 전에 마음을 바꿔서 신학교 진학을 결심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의 음성을 들은 것도 아니요 내가 주의 종으로 선택되었다는 확신도 없이 6ㆍ25라는 상황과 담임선생님의 권고라는 주변의 상황에 밀려서 신학교에 입학한 자로서 이래도 되는가 하는 두려운 마음을 가졌던 차에 장공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얼마나 용기와 위로를 받았는지 모른다. 그 까닭은 저렇게 위대한 김재준 목사님도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어서가 아니라 밀려서 목사가 되었고 목사로서 훌륭하게 일하시고 계시는데 비록 내가 하나님의 계시나 음성을 듣지 못하고 목사가 되었어도 앞으로 최선을 다하면 목사로서 잘 감당할 수 있겠구나 하는 격려의 말씀이 된 것이다.

내가 한국신학대학에서 4년 동안 공부할 때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입학하였다. 당시는 8ㆍ15 해방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기에다 남북 분단으로 인해서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들 또 6ㆍ25 전쟁으로 인한 엄청난 피난민 등이 어울려서 극도의 혼란기였기 때문에 신학교에 온갖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입학한 때였다. 입학하여 얼마 다니다가 그만 두는 사람,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계속 말썽을 부리면서도 끝까지 신학교를 졸업하는 사람, 졸업하고 목회 아닌 엉뚱한 직업을 갖은 사람들,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공부를 하였다.

장공 선생님을 회상할 때 선생님은 이처럼 다양한 사람들을 그 넓은 품에 다 품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너는 믿음이 좋고, 너는 믿음이 없다. 너는 품행이 단정하고, 너는 제멋대로 사는 놈’이니 하고 구분하지 않고 모든 제자들을 자기가 인도해야 할 어린 양으로 여겨서 선한 목자의 자세로 하나 같이 다 사랑을 베풀고 돌보아 주셨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특기할 만한 일은 당시 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김재준 목사님의 신학을 문제 삼아 목사직 면직이라는 목사로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그의 모든 문하생들이 장공 선생님과 함께 운명을 같이하여 오늘의 한국기독교장로회와 한신대학교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장공의 문하생들이 은사와 함께 끝까지 행동을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자신들을 가르친 은사라는데 끝나지 않고 그보다 더 진한 인간적이며 신앙적인 그 끈끈한 유대에서 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 신학교에서 어느 교수가 총회에서 학문적으로 문제되었을 때 과연 그에게서 배우고 또 사랑을 받았던 제자들이 몇 사람이나 그 교수와 운명을 함께 할 수 있을까?

한국 민주화의 초석이신 선생님

끝으로 장공 김재준 목사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그분은 구약을 전공하셨지만 어려웠던 조선신학교 시절이나 초기 한국신학대학에서 두루뭉실하게 가르쳐 주신 것으로 기억된다. 세상을 떠나신 장공선생님이 한국 신학계에 ‘어떻게 학문적 공적을 남겼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 분께 대해서 이것이라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나의 무지인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장공 선생이 남긴 발자취는 신학이라는 학문적 분야에서 평가할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삶, 곧 예수의 뒤를 따르는 제자요 목자로서 이 시대를 이끌어간 그의 인격과 삶 그리고 믿음으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분은 신학자의 길을 걷되 이 땅 위에서 선각자의 삶을 살았다. 장공 선생님은 이 민족이 외세의 억압을 받았을 때 민족 자존(自存)의 정신을, 교회가 교권주의자들과 선교사들의 사슬에 매였을 때 단호하게 일어나서 그 사슬을 끊었으며, 독재자들이 발호하여 선교자유와 인권을 억압하였을 때 이를 독재자들에게 하나님의 주권과 참 인간화를 위하여 자신의 몸으로 곧 삶 그 자체로 또 모든 글에서 증언하여 오늘의 한국 민주화의 초석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서 이 땅에 존재하게 된 한국기독교장로회가 ‘하나님의 선교’의 기수가 된 것도 그 분의 가르침을 받은 모든 제자들이 그분의 정신을 이어 받아서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땅의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의 선교의 밀알들이 되어서 살고 있지 않은가?

사도 바울이 “너희가 바로 나의 편지요 추천서”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장공 선생님의 삶과 정신 그리고 그의 믿음은 지금도 그분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모든 제자들의 삶을 통해서 계속되고 있다. 여기에 그 분의 위대함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지금 한신대학의 기관지라 할 수 있는 「세계와 선교」에서 장공회상이란 고정 칼럼을 만들어서 장기에 걸쳐서 연재하는 것도 그 분의 삶과 학문이 이 땅에 얼마나 큰 발자취를 남겼나 함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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