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5일 수요일

장공 김재준 / 고정희

장공 김재준


고정희 (시인, 한신대학교 동문)

학자라면 으레 가난하디가난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뜻 하나, 머리 하나로는 공부하기 수월찮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 시절에 태어나 그런 시절을 살아온 장공 김재준은 따뜻하기로, 결곡하기로, 사랑스럽기로 짝없는 사람이었는데, 그의 살아 생전 덕담 하나를 짝없는 실수로 수유리 오솔길에 떨어뜨렸습니다.

어느 가난한 목사의 첫 아들이 불치의 병상에 눕게 되었습니다. 죽는 날을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 없는 게 사람의 일인지라 생사를 가름하는 수술을 받던 날, 죽어가는 아이에게, 우유배달 해서 공부하는 신학생의 피가 하루 낮 생명을 연장하는 데 보태졌습니다.

수술이 끝난 후 아이는 죽었고 사람들은 제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이 일이 목에 걸린 장공 김재준은 주말마다 꼬박꼬박 그 고학생을 불러내어 청진동 해장국집 골목을 전전하며 몸보신시키는 데 꼭 삼년을 바쳤습니다.

그 신학생은 장성하여 이제 교수가 되었고 “창조의 모습대로 인간 회복”이라는 장공이 남긴 붓글씨 속에서 뜨겁던 피를 수혈하고 있습니다.

(高靜熙 시선, 『뱀사골에서 쓴 편지』, 미래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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