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4일 화요일

스승의 실패작 / 홍성봉

스승의 실패작


홍성봉(제주노회 원로목사)

(1)

1945년 4월 부산 남부민동 산기슭에 초라한 목조건물 이층과 강당 그리고 교실이자 기숙사였던 몇 채의 천막 그것이 내가 입학했던 피난살이 한국신학대학의 모습이었다. 당시의 이사장이셨던 박용의 목사님의 인도로 함께 찾아간 피난살이 학교는 초라하기 한없었지만 그래도 그곳은 당시에는 유일하게 문교부 대학령에 의한 인가 받은 신학대학이었고 한국에 있어서 신학 교육에 변혁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장로회를 탄생케 한 장공 김재준 목사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일 학년 때 김재준 목사님께 성서강독이란 과목으로 신학입문적인 교육으로부터 시작해서 이 학년 때는 구약개론과 신명기를 삼 학년 때는 대, 소선지서와 조직신학을 사 학년 때는 조직신학과 예배학, 특히 설교학을 배운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4년 신학교 생활 중 김재준 목사님의 강의를 출석치 않은 학기가 없었고 서울에 수복해서 서울역전 동자동에 학교가 있을 때는 교수 사택이나 학생 기숙사가 모두 모여 있어서 아침, 저녁 한가족 같은 생활을 하면서 지냈었고, 오늘의 성남교회에서 1956년 졸업을 했다. 그러므로 김재준 목사님은 내게 있어서 분명히 은사임에 틀림이 없고 누가 뭐라고 해도 그분에게서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은 내게 있어서 자랑스러운 일이다. “장공 회상”에 대한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는 영광스러운 느낌마저도 들었다.

그러나 막상 붓을 들고 은사와 나와의 관계를 회상 해보니 목사님과 나와는 특별한 개인적인 관계가 없는 것 같고 자랑할 만한 게 내세울 것도 없는 것 같다. 목사님의 자서전적인 『범용기』 머리말에서 스스로 말씀하셨듯이 유교의 영향 아래서 자라신 탓인지 함경도 출신들이 목사님께는 더 가까운 것 같았고, 혈연적 아무관계가 없는 나는 그분의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오늘의 나는 그분의 사상과 가르침 아래 내 뜻과는 관계없이 그분의 뜻에 따라 빚여진 그분의 작품의 하나가 되어버렸다고 느껴진다. 왜냐하면 김재준 목사님을 만나지 않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면 오늘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2)

나는 전남 목포중앙교회 출신이다. 내 조부님은 장로님이셨고 나는 믿는 가정에서 자랐다. 전남은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선교지였기에 정통보수주의가 어린 내 신앙의 바탕이 되었다. 모세오경은 모세가 썼으며 성경은 절대무오하며 예수는 성령으로 처녀에 잉태되어 나셨다고 그냥 믿고 자랐다. 아니 믿었다기보다는 교회에서 목사님들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랐다.

그런데 해방이 된 조국에 자유와 함께 신신학이 들어와서 예수가 처녀에게서 낳지 않았다고 말하는 신식목사가 생겨났다고 듣게 되었고 그분이 바로 김재준 목사라는 것이었다. 장로의 손자이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교회를 다니면서도 기독교신앙 자체에 희의가 고개를 쳐들기 시작하던 젊은 시절에 신탁통치 찬성과 반대라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유물론적 사회과학 분야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던 내게는 신신학자란 말에 그 어떤 매력을 느꼈고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한국교회에 자유로운 학문적 연구의 자유를 주장하다 이단으로 몰렸다는 김재준 목사의 소문 때문인지 신학교에 갈 것을 생각도 안 했던 나는 그 분이 퍽 멋있는 목사님이라는 선입관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학교에서 만난 김재준 목사님은, 구제품 양복을 입어서 그랬었는지 몰라도, 시골 농사꾼이라면 꼭 어울릴 풍채였다. 더욱이 목사님의 사모님은 더 틀림없는 시골 아주머니였고 그러기에 훗날 부부 동반으로 꼭 참석해야 될 공식 장소가 있게 되면 목사님은 딸을 데리고 참석하셨다는 소문이었다(이 소문은 어디까지나 내가 들은 소문이고 확인해본 일은 없으니 책임질 수 없다).

내가 지금도 인상에 남는 것은 첫 수업 시간에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천천히 부르셨는데, 가나다순으로 작성된 출석부 순서라 홍 가인 나는 거의 끝에 가서야 불렀고, 대답하는 나를 한참 쳐다보신 것 같았는데 그때 한번으로 내 이름을 외워 버리신 것이 아닌가 싶다. 모세오경은 모세가 썼다고 무조건 믿고 있던 나에게 J문서가 어떻고 E문서는 어떻고 하며 가르치신 목사님의 가르침은 학문적 소양이 전혀 없는 내게는 생각보다 반감이 앞섰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반감은 멋쟁이 교수의 모습을 꿈꾸던 내 선입관이 무너진 실망감이 더 작용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김재준이라는 명성에 끌려 나도 가까워지고 싶었지만 4년 학창생활 중에 나를 특별히 인정해 주신 것 같지 않다. 서울에서 공부할 때는 목사님이 경동교회에 목회도 겸하고 계셔서 이왕이면 유명인의 설교를 듣고자 동자동에서 장충동까지 가서 예배에 참석했었지만 목사님의 설교는 결코 웅변적이 아니면서 차분하고 조용하니 강의 듣는 것과 같아 마치 자장가를 듣는 듯 졸다가 돌아온 시간이 많았다.

회상의 글을 쓰려고 인상에 남았던 설교가 무엇이었나 생각해도 생각에 남는 것이 없으니 죄송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 반면에 목사님의 글은 설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힘이 있고 생명력이 넘치는 명문이었다.

“한국에 온 선교사의 신학사상은 거의 전부가 극단의 보수주의자들이었으며 뒤를 이어 나온 젊은 선교사들은 역시 그런 타입의 사람만이 선택되었다. 따라서 그런류의 사람이 아니고 서는 한국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본래 극단의 보수주의자라는 것은 이미 가진 그것이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것은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심적 태도를 굳게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한국 교역자가 혹시나 다른 것을 배울까봐 그들은 될 수 있으면 철의 장막이라도 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죽음의 극치에 처해 있다면 몰라도 조금이라도 생명이 있는 한 변천과 진보가 없을 수 없는 것이어서 미국, 영국, 구라파, 일본 등이 다 신학사상에 있어서 활발히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그때에 유독 한국만이 그 감화에서 완전히 제외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위의 「십자군」 제9호의 글은 선교사들에 대한 도전이요, 선교사집권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였고, 돌아가시기까지 붓을 놓지 않고 『낙수』, 『낙수 이후』, 「사상계」, 「십자군」, 「제3일」 등등을 비롯해서 여기저기에 쓰셨던 수많은 글들은 언제 어떻게 내 속에 스며들었는지 내 생각과 내 삶의 모습을 결정짓게 했고 일생을 목회생활을 하면서 시류에 따르지 않고 소신을 갖고 살게 되어 오늘의 내가 되어 버린 것 같다. 목사는 철학을 하는 것보다 문학을 하는 것이 좋다고 말씀하시던 생각이 글을 쓸려고 할 때마다 생각나고 목사님의 글 솜씨가 언제나 부럽다.

내가 졸업하던 때 같은 반 학생은 20여 명이었다. 졸업을 앞둔 목회학 마지막 수업시간에 “목회에서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라는 질문에 김재준 목사님은 “목회의 성공자?” 하고 잠시 반문하시더니 “목회의 성공자는 돈과 여자에 대해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성공자이지!”라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그때 우리는 “와~”하고 웃었지만 목회자로 일생을 보내버리고 늙어진 오늘 새삼 은사의 말씀이 얼마나 옳고 옳은 말씀이었던가를 생각한다.

(3)

1956년 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9월에 군종 교육대에 입대해서 나는 군목이 되었다. 가끔 서울에 외출 오면 수유리 김재준 목사님 댁을 찾아가곤 했었다. 유교적 사상이 몸에 배어서 인지 언제 찾아가도 아들을 대하듯 마음 편하게 대해주셨고, 군대 생활의 모순이나 불평을 털어놓으면 “홍 목사는 성질이 급해 참는 훈련을 해야겠어”하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난다.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고 나 같은 사람은 관심도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목사님은 분명하게 나를 잘 알고 계셨다. 나만이 아닌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관심 있게 파악하고 계신 위대한 교육자였다. 62년에 제대한 나는 광주양림교회에서 목회 하면서도 공식적인 집회 등지에서 목사님을 만나 뵌 것 외에는 개인적으로 찾아뵙지 못했다. 더욱이 68년 이곳 제주도에 와서는 더욱 더 목사님을 뵈올 기회가 없어졌다.

그러던 중 5ㆍ16 군사정권이 영구 집권을 꿈꾸는 가운데 독재자는 삼선개헌을 추진하려고 하였다. 1973년 김재준 목사님은 삼선개헌 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위원장과 민주수호협의회 공동의장이 되셨다는 뉴스를 언론계 보도를 통해서 알게 되었고 정치가마저 숨을 죽여버린 게엄령하에서 민족의 양심으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불의를 용납하지 못하시는 자유인 김재준 목사님의 당연한 삶의 모습이 생각되었다. 나도 스승의 뒤를 따라 야당의 활동이 전혀 없는 이 제주에서 삼선개헌의 부당성을 외쳤다. 그러나 보니 1973년 제주도 삼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조직되었고 그 위원장에 추대되었다. 전혀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았던 나에게 그런 직책이 주어진 것은 오직 김재준 목사님의 제자라는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되고 목사님의 삶의 태도는 어느덧 내 모습으로 변해 있었던 것 같다.

그 후 박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힘들고 어려운 생활을 했다. 나는 목사님을 찾아가서 제주도에서의 고충과 어떻게 처신해야 될 것을 물었었다. 당시 군사정권은 사회가 혼란하면 이북이 곧 처들어 올 것같이 선전하고 있고 전혀 정보를 얻지 못한 제주에서의 투쟁은 외롭고 무서웠다. 내 이야기를 들으신 목사님은 “닉슨이 중공에 강한 압력을 행사하고 있으니 김일성은 절대로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두려워 말고”고 용기를 주셨고 “옳은 건 옳다 불의는 불의다” 분명히 말하는 것이 목사로서의 처신이지만 정치적인 움직임에 깊이 관여하는 것보다 목사로서 목회가 더 중요하다고 말씀해 주셔서 내가 어떤 처신을 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작정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주셨다.

1978년 영국 버밍엄 셀리옥 1년 수학 시절에 그곳 도서관에서 「제3일」 4․6배판 잡지를 발견했을 때는 목사님을 뵈온 것같이 반가웠고 해외 생활에서도 꾸준하게 글을 쓰고 계신 것을 알게 되었고 감명 깊었다.

캐나다에서 귀국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먼 곳에 산다는 핑계로 찾아 뵙지 못하다가 건강이 나빠지셨다는 소식이 들려 86년 가을경인가 서울에 간 기회에 우이동 산밑에 있는 아드님 댁에 계신 목사님을 찾아 뵌 것이 생전에 목사님을 뵌 마지막이 되었다. 머리맡에는 여전히 글을 쓰시는 종이 등이 있었고 인사드린 나에게 “지금도 제주도 있나?” 하고 물으신 것이 그날들은 말씀의 전부였다. 이듬해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더 자주 병문안 못간 것이 한스러웠다. 경동교회 지하실에 마련된 빈소를 찾아가 미소짓고 찍으신 큰 사진 앞에서 묵념하고 돌아선 것이 스승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다.

(4)

만일 김재준 목사님을 조각가로 비유한다면 그분의 제자들은 그 분이 공들여 만들어낸 작품일 것이다. 나는 과연 스승님이 생각하실 때 ‘성공작일까, 실패작일까’ 생각해 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실패작인 것만 같다. 수천 명 모이는 교회의 목회자도 못되었고 명설교집 써낸 저술가도 못되었으며, 더욱이 이름을 날리는 유명인도 못된 나는 스승님께 죄송하다. 그러나 실패작이라 자책하는 나를, 내 은사 목사님은 당신의 사상을 닮아버린 나를, 하늘나라에서 빙그레 자연스러운 웃음으로 봐 주실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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