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4일 화요일

숨어서 본 스승 / 나길동

숨어서 본 스승


나길동 목사(대구 수석교회 명예목사)

필자는 김재준 목사님을 뵙기 전부터 그분의 글을 탐독했다. 왜정 때인 중학생이었을 무렵 어느 친구네 집에서 뚜껑 없는 책을 얻어 읽었는데 그것에 퍽 감동되었던 기억이 있다. 뚜껑이 없으니 누가 썼는지 모르지만 거기서 나오는 시들 중에 “베틀에 북 같은 나의 날들은 소망없이 끝막아 버립니다” 등등을 지금도 암기할 정도이다. 또 그것들이 성서 말씀인 줄도 몰랐고, 오랜 훗날 내가 한신데 들어와서야 그 글들이 『낙수』(落穗)에 담겨진 글이며 욥기에 있는 성구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제일 마지막 글은 “송형”(宋兄)에게“ 혹은 ”송형(宋兄)을 찾아서“란 제목인 것 같은데 일본어로 쓰여진 것 같다. 그 일본어 문장이 어찌나 멋있었던지 어린 내 마음을 사로잡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 책은 내 친구의 아버지가 본 책일 텐데 그분은 믿지 않는 분이다. 어찌해서 믿지도 않는 분이, 그것도 뚜껑이 떨어진 책을 집에 보관했을까 하는 것도 나에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이렇게 나와 스승과의 인연은 숨겨짐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필자는 모든 면에 특출하지 못해서 스승에게 사랑도 못 받았고 남에게 노출되기를 싫어해서 언제나 음지에서 막연히 넘겨다보는 소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므로 나는 스승을 알았어도 스승은 내 존재를 기억조차 못하실 줄 안다.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 스승을 찾아뵙는 적극성도 없었고, 그 분을 초청해서 강연이나 설교를 부탁드려 본 적도 없다. 1984년인가 대구 YMCA에서 김 목사님 초청강연을 했는데 아마도 그때 내가 YMCA 이사장이어서 사회도 본 것 같지만 내가 주체가 되어서 초청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엄연히 그분의 제자요, 그분은 나의 스승임에 틀림없다.

첫인상

필자는 북한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피난 나와서 5년을 일선에서 배회하다가 1954년도에야 한신에 입학했다. 입학식 날 교수님들이 다 앞에 앉으시는데 누가 학장인가 하고 목을 길게 뽑고 보았다. 함태영 부통령이 학장이란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분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궁금했다. 제일 먼저 단에 오르는 분이 학장일 게라고 생각하였는데 먼저 단에 오르시는 분은 의외로 너무 초라해 보였다. 부통령이면 옷이라도 잘 입었겠는데 그분은 옷도 초라했다. 키도 작고 머리는 주먹만 했고 첫 음성은 꼭 종이 찢어지는 소리요, 뒤에선 잘 들리지도 않았다. 유명한 분은 겉모양에 있는 게 아니라 내용에 있겠지 생각했다. 알고 보니 저분이 함태영 목사님이 아니고 김재준 목사님이라고 했다.

우선 그 성함이 막연하나마 호감을 갖게 했다. 단에 오르시는 자세나 음성이 점점 무게 있어 보였고, 뭔가 권위가 있어 보였다. 대개의 목사님들이 거룩을 빙자해서 소리를 높이고 웅변조로 말장난하는 것보다는 김 목사님의 조용하고 과장 없고 허례 없이 순전함에 호감을 가졌다. 솔직히 말해서 필자는 한신에 들어가서 다른 교수님들의 강의는 무슨 소린지 잘 몰랐으나 김재준 목사님의 설교와 강이가 내 사상의 주류를 형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겉모습과는 전혀 다른 보화가 그 분 속에 감추어 있음을 신기하도록 감탄하며 그분의 인격에 점점 빨려 들어가게 되었다.

그 몇 가지 일들

그분의 강의 시간에 나는 옆 친구와 농을 했던 것 같다. 앉아서 강의하시던 목사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셔서 떠드는 학생을 제재할 기미를 알아차리고 움찔했다. 그런데 목사님은 의외로 내 옆의 여학생을 향하여 손가락으로 지적을 하면서 “너! 나갓!” 하신다. 그 여학생은 홍당무가 됐는데 그것으로 끝이고 말았다. 잔잔하신 분이 그런 성깔도 있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한신을 졸업하고 나는 해병대 장교 후보생 시험을 쳤는데 한신에서는 나 한 사람만 합격이 됐다. 김 목사님에게 인사를 드렸더니 그분은 돋보기 너머로 눈을 치켜 뜨시며 “홍일점이로구나!” 하셨다.

해병대 장교 훈련을 죽기 살기로 받고 있을 무렵 그분에게서 편지 한 장이 날아왔다. 그때 당시 양면지에 몇 자 적었는데, 참고 몸조심하고 다른 후보생들에게 모범이 되라는 말씀이었다. 그 편지를 꺼내 읽으며 눈물짓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그분은 가시고 이 제자도 칠순을 훨씬 넘기고 있다.

1984년에 캐나다에서 돌아오셔서 대구 YMCA에 강연차 오셨다. 내가 사회를 하고 강연을 마쳤는데 점심 대접을 하면서 대구의 교회 실정을 말씀드렸다. 한국의 교회가 이렇게 수적으로 발전한 것은 하나님의 축복인데 그 교인들에게 알찬 내용을 넣어 주는 일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하셨다. 필자가 모 대학에 강의를 나가는 데 내 강의 때문에 학생들이 데모를 한다 해서 내쫓긴 일을 말씀드렸더니 침묵의 반응을 하셨다. 그래서 좀더 구체적으로 “제가 강의를 못하게 된 이유는 제가 ‘김재준 제자’이기 때문이랍니다” 했더니 크게 웃으셨다. 그 길고 강정애 장로님이 입원한 영남대학 병원으로 문병을 갔다. 병동에 들어서자마자 목사님 말씀이 “내 애인 강 장로가 어떻게 된 거야!”해서 모두 웃었다. 얌전하신 분도 그런 농을 하시는구나 생각했다.

내 속에 흐르는 그분이 모습

지금도 내 속에 형성된 신학이 있다면 그 기초와 골격은 모두 김 목사님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40여 년 설교했는데 한결같이 꼭 원고를 작성했다. 강단에서 내가 전해야 할 복음을 옳게 전하는데 최선을 다했지, 누구에게 감명을 주려 했다든가, 과장이나 웅변조로 하지 않은 것도 그분에게서 배운 것이라 생각한다. 그분이 일생 동안 신학의 길, 그리고 배움의 자세를 보여준 것처럼 나도 밤잠을 설치면서 책과 싸웠고 한 설교를 위해 적잖은 노력을 바쳐왔다. 또 어디를 가나 내 소리를 내려고 노력했지 남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내게 주신 복음의 확신에서 열등의식이나 교만함이 없이 자부심을 갖고 평생 동안 설교해 왔다고 믿는다. 그러면서도 좁아지지 않으려고 마음을 개방하고 타를 수용하려고 애써왔다. 그래서인지 나는 세속 곳곳 여러 분야에 참여했고 다양한 곳에 불려 다녔다. 이런 것이 아마 스승에게서 얻은 삶의 자세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분을 따라잡을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분의 말과 글이 일치하고 문장과 행위가 조화를 이룬 것을 그저 쳐다만 볼 뿐이다. 또 그분과 같이 문장이나 책을 잘 요약하는 분도 천부적이지… 그래서 그분을 기독교의 이광수라 하면 어떨지…, 과대 과소가 없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살아가신 분, 예와 아니오가 분명했고 온 생을 시종일관하게 한 목표를 위해 사신 그분의 도량에는 도저히 미칠 수 없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이분에게도 흠점이야 없겠는가? 그 흠점까지도 우리들에게 긍정적 교훈이 되리라고 믿으며 좋은 스승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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