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4일 화요일

장공, 우리 모두의 머릿돌 / 박근원

장공, 우리 모두의 머릿돌


박근원(한신대학교 명예교수)

“건축하는 사람들이 내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시 118:22).

이것은 한신대학교 서울 수유리 동산 본관의 머릿돌에 새겨진 성서구절이다. 한자로 음각 되어있다. 이 글씨를 쓰신 분은 당시 이 학교의 명예학장이면서 대한민국의 부통령이셨던 함태영 목사님으로 밝혀져 있다. 이 캠퍼스에 초석을 놓은 날짜도 새겨져 있다. “1957년 4월 19일 수난 금요일 정초” 라고. 이 날짜를 정초일로 정한 어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4월 19일은 1940년에 이 학원의 모체인 조선신학원이 개교한 날이기 때문이다. 이 새 캠퍼스의 터를 잡던 날이 수난 금요일이었음도 우리 학교의 건교 정신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머릿돌은 한 역사의 기록이면서 그 역사에 얽힌 상징이기도 하다. 머릿돌의 상징에서 장공 김재준 목사님을 떠올리게 된다. 그분이야말로 내 인생의 머릿돌이요, 우리 대학교의 머릿돌이요, 관련된 모든 사람과 기관의 머릿돌이시다. 그분이야말로 특정인이나 특정 기관이 사유화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초석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충주 서남교회에 가서 고종명목사의 사무실에 들렀다. 고 목사가 앞서 이야기한 수유리 캠퍼스에 머릿돌을 놓던 날 찍은 기념사진을 하나 보여 주었다. 고 목사는「한신소식」(19집)에 실린 옛날 사진을 오려서 지금껏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이 소식지의 편집자는 우리 대학교의 역사적이고 민족사적인 위상과 건교 정신을 이렇게 표제에 설명하고 있다. “진정한 민족대표, 영원한 한신 정신”. 반세기나 지난 옛날 사진이었으나 그 역사성을 밝혀주기에 충분한 흑백사진이었다.

고종명 목사 자신은 그런 표현을 하지 않았지만, 자기도 이런 훌륭한 한신 정신의 유산을 받았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이 정신적 유산을 간직한 사람으로서 우리 대학교의 ‘재단이사’의 직분을 맡고 있다는 긍지를 은근히 보이기 위해서 이 사진을 꺼내 보였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기념사진의 뒷줄에 내 얼굴도 끼여 있어서, 방문한 나를 반길 겸해서, 보여준 것 같다.

이 기념사진에 찍혀있는 사건의 핵심은 물론 ‘머릿돌’이었다. 그날, 정초예식을 마친 직후에 찍은 기념사진인데, 장공 김재준 목사님과 송암 함태영 목사님이 머리돌 양쪽 위에다 손을 얹고 좌우로 서 계셨다. 송암 선생님 옆에는 우리교단의 거물 어른이셨던 박용희 목사님이 버티고 서 계셨고, 그 반대쪽에 장공 선생님, 그 뒤로 김정준, 전경연, 안희국, 최윤관 등 여러 어른들이 계셨다. 내가 알아볼 수 있는 모습으로서 이여진, 정용철, 박한진 등의 목사님들도 함께 하셨다.

이 기록사진에 마땅히 끼어 있음직한 얼굴로는 우리 학교의 초석을 놓으셨던 송창근 목사님과 김대현 장로님 같은 분들이 있다. 그러나 김대현 장로님은 작고하신 후여서 그 아드님이신 김영철 장로님의 모습이 대신 비치고 있었다. 송창근 목사님은 한국전쟁 때 납북되셔서 그 생사를 알 수조차 없다.

이 분들을 배경으로 한 수유리 캠퍼스의 ‘머릿돌’ 기념사진을 보면서 잠시 나도 모르게 상념에 빠지게 되었다. 한국전쟁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해방 후 한국장로교의 남부총회의 지도력이 그대로 있어서 발전되었더라면, 이들이 명실공히 한국교회 전체의 머릿돌 구실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6ㆍ25사변 후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이 이 일에 찬물을 끼얹기는 했지만, 이 땅의 교회역사가 흐를 만큼 흐른 다음에 언젠가는, 이분들이야말로 한국교회의 모퉁이 돌이요 한국교회 신학의 머릿돌이었음을 재확인하는 그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장공 김재준 목사님은 누가 뭐라고 해도 한국교회와 한국신학의 머릿돌이심을 이 기념사진이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김재준 목사님은 우리 교단이나 한신 공동체만이 아니고 한국교회와 한국역사가 공유할 수 있는 그런 크신 분이셨기에 두고두고 감사하게 된다. 장공은 내 개인적인 인생의 초석이기에 앞서 우리 모두의 머릿돌이셨음을 느끼기에 새삼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무슨 인연으로 장공과 그가 머릿돌이 된 한신 공동체와 그가 일군 교단에 부름을 받아 일생을 바쳐 일할 수 있었던가. 그분을 한국민족의 지도자요 한국교회와 신학의 머릿돌로 존경하며, 지금에 이른 나 자신을 생각해 본다. 내가 기장과 한신 만의 울타리가 아니라 우리겨레와 한국교회 전체를 아우르는 신학자로 발돋움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분의 신학과 신앙, 그리고 그분의 정신사적 유산 때문이 아닐까하고 스스로 돌이켜 본다.

장공 탄신 100주년에 즈음하여 그분을 회상하는 글을 쓰게 되어서 감개무량할 따름이다. 이렇게 햇수로 계산을 해보니 내가 태어났을 때에 장공의 연세가 33세이셨다. 내가 한신에 입학했을 때 그분이 53세이셨는데, 내 나이가 53세가 되었을 때, 공교롭게 그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 그분에게서 학과목으로 전수 받은 것은 ‘목회학’밖에는 없었다. 그래도 그분은 내 신학의 머릿돌이 되셨다. 구약신학자요 기독교윤리학자로서의 그분의 영향을 그분의 글들을 통해서 깊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크게는 그분의 학문하는 자세에 매료당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내가 터득한 실천신학적인 면에서 평가하자면 장공은 “그리스도교 생활론”을 대성하신 분이시다. 내가 이것을 정리하지 못한다면 후학들에게라도 정리하라고 부탁하고 싶은 장공 신학의 아주 큰 테마이다.

장공은 우리 가정의 머릿돌이시기도 했다. 이분 주례로 우리 부부가 결혼을 했고, 첫 딸아이의 이름도 이분께서 지어 주셨다. 지어주신 이름 뜻과 그 자상함에서 이 스승의 인간성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가 있었다. 먼 훗날 우리 부부의 결혼 25주년을 기념하는 조촐한 점심식사에 오셔서 축복기도까지 해주셨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 가정에 머물게 해 달라’하신 그분의 간구를 우리는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 정말로 고마우신 분이셨다. 나는 없었지만 내 아내가 아무도 없는 장공의 마지막 임종의 순간을 지켜드릴 수 있었던 것을 결코 우연한 일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장공이 우리 한신 공동체의 머릿돌이 되신 것에 대해서 아무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와 한신 공동체와의 관계에 있어서 장공의 태도는 늘 긍정적이지만은 않으셨다. 1970년대 초에 내가 미국에서 학위를 마치고는 귀국준비를 서두르고 있는데 장공은 ‘돌아와서 뭐하겠느냐’하고 핀잔을 주셨다. 좀 섭섭했는데, 국내의 학교사정이 어려워서 그러신 것 같았다. 뒤에 미국에서 목회를 잘하라는 뜻으로 ‘시편 23편’을 붓글씨로 정성 들여 쓰시고는 족자로 만들어 인편에 보내주셔서 위로를 받기도 했다.

몇 해 뒤에 나는 한신으로 돌아왔고, 장공께서는 망명 아닌 망명처럼 캐나다로 건너가 계셨다. 1970년대 말, 수유리 캠퍼스는 격동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이곳에 ‘장공 기념 도서관’을 건축하기로 작정하고 진행 중이었는데 본인이 흔쾌히 허락을 해 주시지 않았다. 그 당시 통신의 검열이 심했던 때라 인편으로 여러 차례 승낙을 간청했으나 응답이 없으셨다. 당시 학내사정에 대해서 부정적인 정보들을 들으셨던 터라 모든 자초지종을 긴 글로서 설명드렸더니 그제서야 인편으로 승낙회신을 주셨다. 수유리 캠퍼스의 장공도서관 기공예식 마지막 순간에 그분의 글을 받아 읽으며 감격했던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1980년대 우리 학교가 종합화 계획에 따라 정부로부터 「한신대학」인가를 받고 어려운 새 출발을 할 즈음에 해외에 있었던 내가 초대학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해외에서 돌아와 황무지에서 종합대학을 일구는 임무를 수행하는데 학교 안팎으로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캐나다에 체류 중이셨던 장공께서 한신대학 종합화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계신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장공은 이런 한신의 발전사를 두고, 민주화 운동의 시각에서, 종합화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주장하는 정보만 들으셨던 것이다. 거꾸로는 이분의 뜻이 부정적이면 국내 교단이나 학교에도 곧 바로 그렇게 전달되기 때문이었다.

한해 여름방학에 한신대학 발전의 자초지종을 보고하고 기도해 주십사 부탁드리러 캐나다 토론토에 계시는 장공 선생님을 방문했다. 가벼운 수술을 받고 자택에서 요양 중이셔서 긴 대화는 어려웠기 때문에 간추려 우리 대학 현황을 말씀드렸다. 대학발전에 관한 부정적인 견해가 한편으로는 교단 쪽에서, 또 한편으로는 학내 쪽에서 장공에게 전달되었고, 운동사적인 맥락에서만 입력된 편견을 수정하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결국 설득을 못하고 귀국하였다. 무척 섭섭했다.

내 학장 임기가 한참 지난 후에 장공께서 캐나다에서 아주 귀국을 하셨다. 그때 당장은 아니었지만, 언젠가 그분의 한신 종합화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있었는데, 무엇이 그분의 생각을 바꾸게 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분이 심경의 변화를 가져온 동기들에 관하여 짐작이 가는 것은 있으나 먼 훗날에 되새겨 보고 싶을 뿐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장공은 우리 모두의 머릿돌이시다. 이 머릿돌을 중심으로 응집된 우리 역사의 에너지를 미래지향적으로 바르게 계승할 때, 우리 개개인도, 한신대학교도, 우리 교단도, 그리고 한국교회도 ‘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빛이 되어 이 민족과 인류의 역사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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