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4일 화요일

참 목사님, 우리 목사님! / 김은희

참 목사님, 우리 목사님!


김은희(선린교회 장로, 16회 졸업동문)

목사님! 조금 걸어서 잠사 차를 타고 목사님을 뵈러 갈 수 있었는데. 이 말 저 말 다하지 않아도 목사님께선 다 알고 계셨고, 그냥 답을 받은 것처럼 돌아왔었는데. 멀리 가셨는지 넓고도 긴 하늘은 그대로인데 슬픈 마음으로 목사님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한번도 목사님을 뵌 적이 없는 이들에게 제자들, 성도들, 목사님이 그리운 이들께 제가 뵌 목사님을 전에 말씀드리듯 얘기 할 겁니다. 늘 하셨던 것처럼 따뜻하신 격려를 보내주소서.

첫 만남

그 어른을 처음 뵌 것은 입학시험을 위한 면접이 있던 날이었다. 부산 피난지 미군 부대에서 얻어다 만들었다는, 그것도 하나뿐인 사무실에서다. 자그마하신 몸집에 들랄락 말락한 목소리셨다. 이미 선배들을 통해 그 어른에 관한 말씀은 조금은 들었었지만 내 나름대로 무엇인가 찾아 내려는 마음이었다. 한참을 책상 위의 서류를 보시고 한 마디 하시고 또 한참을 조용히 계시고 몇 번을 되풀이하시는 사이에 난 떨리던 마음도 없어지고 그 어른에 관한 흥분도 사라지고 평안해 질 수 있었다. 그분만이 가지신 분위기라고 생각된다.

다른 질문은 기억이 없고, “창작력이 있나?”라는 물으심만 좀 짐작 밖이어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 말이 무슨 뜻이었을까 하고 그후 여러 번 생각했었다. 아마 출신학교에서 보낸 의견서에 문학적인 소질이 있다고 썼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본다. 그후 목사님이 미국을 여행중이실 때 러시아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노벨 문학상 수상에 관한 현지 신문의 기사들을 다 가위로 잘라서 편지와 함께 내게 보내주셨던 일도 결코 잊을 수가 없으며, 미루어 보아 면접 때의 물으심이 새삼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기도 하다. “창작력은 없고요, 그저 좀 문학을 좋아했었나 봅니다”라고 이제 죄송한 대답을 드려야겠다. 말씀의 뜻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미련한 학생으로 남은 나의 처음 뵌 날의 회상이다.

참 목사님

그 시절 매일 갖는 아침 설교에서도 그 어른의 설교는 펄럭거리는 텐트 자락의 소리들 속에서 우리들의 소란한 마음을 잠재우시며 하늘의 말씀을 들려주셨고, 부산 남부민동 언덕 위 판자촌의 초라함을 넉넉하게 만드셨다. 몇 발 걸어 나가면 양공주들이 우글대는데 그분의 설교는 우리들의 피난지를 성스럽게까지 마드셨다. 밤에는 기숙사가, 낮이면 강의실이 됐던 텐트 건물의 그 시절에도 그분의 강의는 우리로 하여금 명문 대학에 입학한 친구들에게 한번 들어보라고 불러들일 수 있는 긍지를 주셨다. 지금 생각해 봐도 자랑스럽고 어깨가 으슥해지는 것 같다.

그 당시 그 어른이 학교에서 직함이 무엇이었던지 확실치 않다. 그 어른보다 윗 분이 생각나지 않는 점으로 보아 아마 학장님이셨던가, 아니면 학장 서리셨는지도 모르겠다. 동문들 몇이 얘기한 일이지만 그 어른은 학장이 되셨다가 학교 사정에 따라 다른 분이 했으며 또 평교수가 되셨다가 다시 하라면 다시 하시곤 하신 것 같다. 이런 일들이 그 어른에게 아무 이상할 것이 없다. ‘목사’라는 직함 외에 다른 칭호에 관심이 없으셨다. 우리들의 오해였는지 모르지만 ‘목사님’이라 불러드리는 것을 좋아하신다고 생각했다. 학장이 되셨을 적에도 목사님, 목사님, 또 훗날에 명예박사학위를 받으셨는데 그 후에도 그냥 목사님으로 불러드린 것 같다. 버릇이 돼버린 오랜 제자들은 자연스럽게 늘 그랬다. 누가 그 어른이 학위가 없다고 강의를 못한다고 말할 수 있었으며 목사님으로 불러드렸다고 학장직보다 낮다 할 수 있겠는가? 그분에게는 그런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보였을 테니까. 그 어른은 참으로 그렇게 목사님이셨다.

예수의 마음을 전하신 분

지금 부산 어디쯤인지 모르겠지만 주일이면 교회가 되는 다방이 있었다. 피난지에서의 장소라 어둡고, 들어가고 나오는 복도며 환경이 지금 사람들은 가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바로 거기서 하나님의 복음은 설파되었다. 천정을 보시다 발 아래에 눈을 두시며 날마다 파멸의 혼란을 수습하고 모여 앉은 절망적인 영혼들에게 희망찬 메시지가 설교됐다. 전할 말씀을 다 토해내신 조용하고 기운 없이 보이시던 발걸음을 따라 남부민동 언덕을 올라가며 우리는 힘을 내서 다시 살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처럼 또 한 주간을 시작할 수 있었다.

서울에 환도한 후에도 국민 거의가 다 그랬지만 학생들, 특히 우리는 흡사 거지들 같았다. 미국 구호물자로 옷 입고 미국 군인들을 위한 상자로 먹을 것을 보충 했었으니까.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는 부자였다. 목사님의 강의와 설교가 한신 역사에서 전성기에 이르러 있었고, 주일이면 경동교회 대학생 공부(김석목 교수 지도)와 11시 대예배에는 목사님의 설교, 오후에는 다시 동자동 세브란스병원의 에비슨관으로 가서 함석헌 선생님의 열찬 강론에 참석할 수 있었기에 참으로 넉넉한 마음의 부자가 되었다.

목사님께선 설교하시러 세상에 오신 것 같기도 했다. 경동교회는 그때 교육관도 짓기 전 목조건물 이층의 좁은 방이어서 늦게 온 사람들은 계단에 혹은 계단 아래서 예배를 드렸다. 학생들을 위한 설교, 전국 각지에서 열리는 청년대회, 신도대회, 노회, 총회, 모든 모임에 거의 목사님의 설교하셨다고 기억한다. 어려운 시절에 그 어른의 설교는 그리스도의 메시지로 대지에 전해지고 혈기를 감추며 욕심을 줄이고 예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도록 변화시키셨다.

교회 직분은 귀증한 직분이다.

목사님께선 교회직분을 아주 크게 보셨다. 그 어른 자신이 ‘목사’라는 직함을 다른 어떤 칭호보다 중요시하셨으니까. 목사님의 막내 아드님이신 김관용 장로의 장로 임직식 때에 목사님은 캐나다에 계셨기에 내가 그 임직식에 참석했다가 다음 편지에 그 소식을 적어 드렸었다. 그 후 그 어른의 답서에서 “교회 직분이란 참으로 귀중한 직분이다. 세상의 방법으로 얻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쓰셨다. 그 아름다운 필적이나 문체와는 달리 단호하고 엄숙함이 서린 서신으로 받아졌었다. 훗날에 나로 하여금 장로 임직을 보게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그때는 그 어른으로부터 일찍이 전해 받은 것 같다.

그후 우이동 댁으로 찾아뵈었을 때 내가 다니는 교회(선린교회)에 대해 이것저것 물으시더니 “땅 위에 교회를 세우는 일이란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하시며, 그 어른으로서는 상당히 큰 목소리로 말씀하셨다고 기억된다. 교회를 설립하신 목사님에 대한 치하도 되지만 인간과 교리의 관계를 그렇게 힘주어 말씀하신 것 같다. 교회가 사람들만 모여있는 것처럼 마음 아플 때 그 어른의 이 말씀은 나로 하여금 나의 구원을 감사하게 하고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주님을 만나기 위해 땅에 서 있음에 감사하게 하셨다.

넓고 깊으신 인간 이해를 지니신 목사님

그 어른께선 큰 소리로 화내시는 것을 한번도 못 뵌 것 같다. 누구를 야단치시거나 없는데서 나쁘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야단맞을 사람이 없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들이어서가 아니었을 것이다. 넓고 깊으신 인간 이해를 지니셨고, 그렇게 그럴만한 절대적인 가치를 세상만사에 두신 것 같지 않으셨다고 회상하고 싶다. 그런 분인데 “저런 어른 때문에 교단이 갈라지는 한국 기독교 교회사에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을까”하고 말들을 했었다.

진정한 설교자로 교육자로 하늘의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가르치시는데, 비록 목소리가 조용하셨어도 가르치심에 거슬리고 온화함에, 속이 뒤틀리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교리나 축자영감설까지 말하기 전에 그 어른의 있는 그대로가 싫은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엄청난 싸움의 주인공답지 않으시며 그 애기에 흥분하시거나, 한 같은 것을 표현하신 적이 없으셨던 것 같다.

세상 뜨시기 얼마 전 우이동 자택에 찾아 갔을 때 “한경직 목사님이 남한산성인가 별장에 계신데”라고 불쑥 말씀하셨는데, 그 어른의 표정이나 어감에서 보면 비난은 아니시고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인지 지금도 잘 이해 안되는 그때 그 말씀에서 한경직 목사님의 성함을 입에 담는 것을 처음들은 셈이었다. 바깥 정치에 대해서도 부정에 저항하는 정신적인 힘으로 대결하고 계셨지만 입에 담으시고 비난하시거나 말씀하시는 것을 뵌 일은 없었다. 악은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할 수 없으셨다고 회상하고 싶다.

목사님 산책길, 등산길

그 어른은 설교하시고, 가르치시고, 쓰시고, 길을 걸으시던 분이시다. 몇 번이나 하셨는지 상상할 수 없는 설교말씀, 평생 하시던 강의, 그리고 그 많은 글들, 제자들이 거의 다 받은 화선지의 글씨들, 그 밖의 많은 시간들을 산책길에 나누셨다. 우이동에 마지막 거처를 준비하실 때도 “조금 걸으면 나무와 숲이 있는 곳이 좋아서”라고 말씀하셨다.

조그만 틈이 생기시면 가까운 산책길에 나서시고 하루쯤 여유를 얻으시면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 이전에는 남산을 걸으셨던지 잘 모르지만 수유리 학교가 자리잡고 그 단지 안에 사택들이 있었을 때 우리(교수님, 직원들, 학생들)는 목사님의 산책길과 등산길에 번갈아 따라 나섰다. 아름답던 수유리 골짜기에 가을이면 낙엽들을 몰아오고, 봄이면 우리를 들뜨게 했던 화계사 골짜기, 삼성암길, 밤나무 우거진 숲에서, 조병옥 박사 묘지언덕, 도선암으로 가는 길에서 그 어른은 말씀을 한마디도 안하신 채로 산책이 끝나는 때도 있었다. 우리는 대체로 떠들고 이야기하고 목사님께 뭔가를 묻곤 했지만 답을 얻어내면 행운이었다. 어떤 말에는 그냥 웃으시고 어느 물음에는 “그럴 수도 있지 뭐”이셨다. 이제 생각하니 철없는 우리들의 이러쿵 저러쿵이 얼마나 우스우셨을지 죄송한 생각이 든다.

백운대에 등산했던 어느 날 일행 중에 어떤 이들은 좀 쉬어 가자고 졸라댔고 아주 앉아 버렸지만 그 어른께선 미소만 지으시고 그냥 걸으셨다. 나는 바로 목사님 뒤로 걸어들며 그 어른의 발을 따라 걷기 시작하고 빨리 걷지도 않고 멈춰 서지도 않고 걸었었다. “이 다음엔 저 애들은 데려 오지 말자”라고 말씀하셨다. 우이동 백운대 입구에서부터 끝까지 거의 같은 걸음으로 걸으셨다. 난 그날 쉽게 백운대 정상에 올랐다. 그날 그 어른은 내게 여러가지를 가르치셨다. 산상에서도 선생님이시고 목사님이셨다. 그 후에 나만 데리고 산책이나 등산을 가신 적은 없지만 난 늘 목사님 뒤에서 사는 지금까지의 삶의 길에서 여러 번 그 어른의 뒷길을 따르는 걸음걸이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오래도록 우리 부부를 지켜온 목사님의 말씀

가정형편이나 개인사정으로 학교를 쉬었다가 다시 하겠다는 학생이 그 어른을 찾아가면 “휴학하면 그만두기 쉽다. 죽음을 각오로 계속하기로 해”라고 이르셨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여러 제자들을 목사로 만드셨고 사는 데서 낙오되지 않도록 해주신 선생님이셨다.

내가 나의 남편과 처음 사귀기 시작하면서 그 어른께 의논을 드렸었다. 목사님께서 그에 대해서 여러 말씀으로 내게 설명하셨다. 물론 그 어른께서는 모든 제자들의 장점과 긍정적인 가능성을 보시고 찾아내시는 분이셨지만 아주 좋게 애기해 주셨다. 강의하실 때나 학생과 마주치셨을 때 별로 쳐다보시지 않으시는 것 같으신데 이렇게 잘 알고 계시구나 하고 놀랐었다. “부탁인데” 하시며, “네가 그 사람보다 못하다는 생각은 하지마라. 그 애는 널 잘 택한 거다” 하셨다. 어느 단어에서 힘을 주어 말씀하셨던 것도 기억하고 있다. 그날 내가 어떤 남자와 만났으며 어떤 부부가 될 것이라고 알고 계시는 것 같았다. 학장 공관 돌계단까지 전과 달리 전송을 해주시면서 “네가 부족하다는 생각마라” 다시 말씀하셨다. 그날 밤 목사님께선 나를 위해 기도해 주셨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서는 울었었다. 난 그 어른의 예수님이 보내신 마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목사님이 세상 뜨신 한참 후, 지난 4월에 나는 장로 임직을 받으면서 축사를 하시던 어느 목사님이 나와 부부를 이루고 사는 나의 남편을 성자처럼 말씀하였었다. 내 친구들 중에 몇몇은 그 축사에 화가 났었다. 아마 우리가 지금 그 어른께 이 이야기를 전해드렸다면 “그 목사의(그 어른의 제자) 말도 틀리지 않지” 하였을 거라고 생각된다.

이 몇 마디 부탁의 말씀들은 오래도록 우리 부부를 지켜왔다. 그 어른의 기원대로 능력을 펴며 딸과 아들도 낳고 사는 것을 세상 뜨시기까지 지켜보셨었다. 캐나다에 계실 때는 사진을 보내드리고, 서울에 계실 때는 늘 세배드리러 갔었다. 캐나다에서 귀국하시고 그 해 동짓날 저희들 집에 오셨었고 그 후 목사님 글에 우리 집에 오셨던 걸 쓰시고 서재가 좋았다고 쓰신 것을 보았다. 편지에는 우리 부부의 이름을 나란히 같이 쓰셨고, 캐나다에서 1982년 8월 15일에 써서 보내신 액자에 넣은 글에도 두 사람 이름을 쓰셨었다.

목사님이 마지막 입원하셨던 병실을 들어서서 그 어른을 뵈었을 때 이 땅에서 스승을 잃어간다는 처음으로 슬픈 마음이 됐었다. 말은 못하고 근육이 다 풀린 팔과 다리를 안마하는 내게 마치 생애를 정리하시듯 은용이는(목사님 큰 아드님) 이러고 저러고, 경용이는(둘째 아드님) 하시며, 좀처럼 타인에게 자녀들의 이야기를 안하시던 분이신데 세상에 남기신 혈육에 대한 의무감이 아니면 좀 더 가족을 위해서만 사시지 못한 그런 마음이셨던 것 같다.

무저항과 불타협은 최고의 전술

그 어른이 아직 건강하시던 어느 해 여신도회 인권위원회 주최로 바자(고난 받는 가족 돕기)가 있었던 날이다. 아직 초벌 구운 항아리나 꽃병 등을 팔면서 목사님의 글씨를 받기위해 바자가 열린 방에 붓을 들고 앉아 계셨다. 나도 직경 20센티 높이 22센티의 자그마한 백자 항아리를 하나 들고 목사님 앞에 앉아 있었다. 한참을 나를 보시고 생각하시더니 간디의 말인 “無抵抗 不妥協」最高戰術也 長空” 이라고 써 주셨다.

우리는 글씨가 희미하게 잘못 구워진 이 항아리를 그 어른이 날마다 보내시는 편지로 읽으며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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