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4일 화요일

나의 분수를 깨우쳐 주신 스승 / 장형일

나의 분수를 깨우쳐 주신 스승


장형일(구세군부령, 전구세공보 편집인)

내가 이 글을 쓰려고 하니 인자하시면서 근엄한 미소로 나를 바라다보시던 고인의 얼굴이 떠오른다.

1) 조선 신학교 입교 동기

우리나라에 개신교 미국 북장로교회가 언더우드에 의해 들어 온 것이 1885년이요. 레이놀즈에 의해 남장로교회가 들어 온 것이 1889년이다. 그는 호남스테이션을 개설했는데 그 파중에 코이트가 우리 지방 담당으로 그들의 선교로 1907년, 내가 나기 4년 전 우리 마을에도 교회가 세워져서 촌장 격인 서병준 노인과 우리 아버지 장기용 씨가 믿게 되고 두 분 다 순천노회 초대 7인 장로 중에 들게 되었다. 나는 소위 모태 교인이어서 10세 전후에 예수교초학문답을 암송해서 신약성경을 성경요리문답을 외어서 구약을 상으로 받았다. 지방, 도 사경회도 다녔고 미션스쿨에서 공부도 했으나 참된 중생의 체험을 얻기는 19세 때 일본에서 구세군의 야마무로 군베이 중장의 「평민의 복음」이란 책을 읽고 거듭나게 되었다.

구세군에 입대하여 하사관이 되고 성경 통신과도 공부했으나 1935년 한국으로 나와서 김월하 양과 결혼을 하고 서울 정동의 구세군 사관학교에 입교하여 다음해 내외가 함께 참위로 임관이 된 후 대구 영덕, 포항, 부산에서 목회를 하다가 1940년 말 구세군이 당국에 의하여 구세단으로 개편되어 인적 물적으로 국제관계가 단절되고 준군대식 조직이 폐지되었다. 나는 일본어에 능통했음으로 구세단 본부로 들어와서 사가모도 단장 통역관이 되었고 이어서 신의주, 춘천을 거쳐서 인천군영 담임시 8․15 해방을 맞이했다.

그전에 1943년 구세교회로 개편되어 합동교단 지도자들에게서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1946년에 국제 구세군으로 환원될 무렵 나는 조선신학교의 송창근 교장님을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9월 학기에 무시험으로 입학이 되어 3년 과정을 2년간 공부하고 1948년에 졸업을 하게 되었다.

2) 학창 시절

입학 전에 김재준 교수님으로부터 신앙고백서를 써 오라고 해서 나의 개심 경위, 그 후의 면학으로 구세군서적 우찌무라 다까구라, 와다니배 구와다, 나아가서는 웨슬레, 캘빈, 루터 등의 저서를 통하여 성서와 신학 교리 교회사 등을 공부했다는 것과 한국에서의 목회경험을 썼다.

나는 인천에서 목회를 하면서 다른 일을 했기 때문에 또 당시의 불편한 교통수단 때문에 충실히 다니지 못했다. 그때의 교수진은 송 교장(신약, 행정학), 김재준 학장(구약, 조직신학), 조선출 서무(신약, 성서지리), 정대위(영어, 역사), 전성천(종교철학), 스코트(구약학), 최윤관(영어), 한경직(교회사), 엄요섭(심리학), 김태묵(교리사), 장하구(독일어, 철학), 유기천(법학), 지동석(신약), 고병여(희랍어), 이규용(종교교육), 채의순(동양사), 김익호(영문학), 최거덕(비교종교학), 백영화(한문), 김종대(교회정치), 유재기(협동조합), 나운영(음악), 박창해(국어) 등이었다.

나는 정규오 목사와 한 책상에 앉았던 것 같다. 시험을 불 때 컨닝하는 사람은 없었지마는 교수님은 시험 감독이라기 보다는 예리한 눈으로 쭈욱 학생들을 훑어보실 때는 찔끔함을 느꼈다. 여담으로 정대위 교수는 나의 영어발음이 정확하다는 것과 70인역에 대한 물음에 내가 답변을 하니 크게 칭찬하였다. 김 교수님도 ‘제2이사야서 40장 1절이 무슨 말씀이냐’ 물어서 내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씀이라고 즉답을 드렸더니 맞다고 칭찬하셨다. 학기 중 숙제는 별로 없었고 어떤 분이(김태묵인 듯) 리포트를 쓰라고 해서 “맑스 베버의 개신교와 자본론”을 써 낸 것을 지금도 보관중이다.

김 교수님은 신명기의 인도주의 법규를 써내라고 하신 일이 있었다. 그에게서 신명기를 한 학기 동안 10장까지인가 공부했는데, 나는 제33장 모세의 축복을 설명해 줍시사 했지만 강원하 군이 준비도 필요하실 터인데 그렇게 되겠느냐고 해서 끝내 배우지 못했다.

신명기 강의 중 모세 오경 가운데 같은 사건을 놓고 서로 판이한 기록이 있음은 각기 다른 입장에서 쓴 것을 모은 것으로 사료설 같은 것을 말씀하실 때 한 나이 많은 장로-학생이 언짢은 소리를 했는데 못마땅하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송교장님이 어떤 연유로 아시게 되어서 모두 듣는데서 “장로님이 대단히 성이 났그먼요”라고 유머로 말씀하셨다. 결국 그런 연유로 해서 나중에 학생들이 분열 탈교하는 모습을 보았다. 학생들이 노량진 어디에서 따로 모였다고 들었다.

1948년 4월 20일 새문안 교회 34회 장로교총회 때 이자익 총회장이 모습, 중절모를 쓰고 지팡이를 집고 위엄을 뽐내던 모습이 지금 눈에 선하다. 그 모임에서 강원용이 흰 손수건을 흔들면서 10년 후에 다시 보자고 말한 것이나, 이일선이 빌라도의 법정이라고 고함을 지른 것도 들은 것 같다. 일이 지난 후 송 교장은 하루아침 채플시간에 해당 학생의 징계사항을 발표하면서 내가 이 일을 피하려고 결사적으로 힘썼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눈물을 흘리시면서 호소하셨다. 이일선의 졸업이 일년간 연기되었고 그는 백지에 손바닥을 찍어서 돌리면서 재기의 결심을 표현하였다. 송 교장이 계셨으면 교단 분열이 없었을 것이라는 말도 훗날 들었다. 지금도 보관중인 김 교수님의 “편지를 대신하여”라는 논문을 바탕으로 그때 학교에서는 신론, 인간론, 구원론이란 얄팍한 팜프렛을 교재로 내놓았고 일정한 교과서가 없었다. 한경직 목사의 교회사는 영어교회사를 그대로 쓰신 것을 나중에 그 영어 책을 구해 보고 알았다.

1948년 봄부터 김 교수님은 졸업생들에게 논문을 써 보라고 거듭 강조하셨다. 어느 신학교나 도서관이나 도서가 없었다. 서점에 참고서도 없었다. 조선신학교 학생은 이북 피난민이 많았으니 더욱 난감했을 것이다.

나는 칼빈주의의 5대 특징을 쓰기로 했다. 한편 나는 1947년 말 서울 구세군 본영으로 전근이 되어서 정규직으로 출근을 해야 되었기 때문에 공부하기에 힘들었다. 교단에서는 공식으로 허락하지 않는다고 송 교장에 하소연을 했더니 ‘그것은 우리의 가르침을 배격하는 것이니 용납할 수 없다’하였다. 나는 무리하게 통학을 계속했다. 서울 천연동 사택에 촛불을 켜놓고 논문준비에 힘썼다. 나가야마 교수가 번역한 칼빈의 『기독교강요』 3권, 아브라함 카이퍼 핫지의 『장로교의 예정론』 등 여러 참고서를 따랐다. 원고지도 없어서 성경통신공과 용지에 100여 페이지 가까이 써서 김 교수님께 드렸더니 참고서를 썼느냐고 물으셨다. 한글도 클린 곳이 많았을 것이다.

하루는 인천에서 늦게 와서 한 시간이 끝날 무렵에 허둥지둥 들어가니 학생들이 막 나오면서 황광은 등 몇 학생이 아는 척하고 인사를 했다. 1952년 내가 진주에서 피난목회를 할 때 동기생인 정준삼씨가 그날 그 시간에 김 교수님이 의외의 학생이 의외의 제목으로 논문을 써냈다고 하시면서 모두 힘써서 꼭 졸업논문을 써내라고 독려하셨다 한다. 뒤에 전학석씨를 통하여 그 논문이 학기중 가장 애를 써서 쓴 논문이었다고 들었다고 하였다. 지금 보관(복사라도 해서)하지 못함이 안타깝다. 쑥스러운 이야기지만 입교 전 신앙고백과 졸업논문으로 그와 나는 학문적으로 연관된 셈이다.

재학중 또 한가지 사실은 졸업설교다. 김천의, 이수천과 나하고 같은 날 하게 되었는데 내가 먼저 하면서 “바울의 개심”을 주제로 설교를 했는데 김 교수님이 자세히 평을 하시면서 원고는 착실히 마련되어 잇고 세 번 나누어 할 성질의 것을 한꺼번에 하느라고 무리라 하셨다. 사료의 정확한 인용은 부흥사의 대강 같다. 맞추는 것과 달라서 정확하다고 하셨다.

3) 교문을 나와서

1950년 3월에 내놓으신 속간 「십자군」환도후의 속간도 애독하였다. 6․25동안 도농에서의 피신은 이춘우씨의 회상으로 잘 알았다. 우리는 서울에 갇혀 있었고 다만 정대위 씨가 옛 기독교서회에서 그 와중에도 영어 책을 읽으실 때 북에서 온 김창준이 무슨 책이냐고 유심히 보던 것, 우리가 종로 중앙교회의 교역자대회에 억지로 갔을 때, 송 교장님도 오셨고 정대위 씨가 김○○목사에게 무슨 선언문인가 낭독을 지시하는것도 보았다. 내가 진주군영에서 구세군순교자(1950. 9.5 순교) 노영수 사관 후임으로 있을 때 대구총회에서 51대 46표로 김 목사님이 제명된 후 교계지에 “於我如浮雲”, 내게는 뜬구름 같다는 심정을 피력했을 때 위로의 편지를 드렸고 부산의 임시 교사로 찾아가서 위로를 드렸다. 1953년 9월 환도 후 나의 처녀작 『예수의 시대』(성지의 지리, 종교, 정치, 역사, 풍습 등 배경연구)의 기독교서회 출판 추천서를 써 주실 때는 어드만 신약주석을 번역하고 계셨다. 문학평론가 김우규에게 그 책을 소개하셨다. 1961년 10월에 군사정부에 의하여 60세 정년으로 한신대학장에서 퇴임 당하였다.

4) 은퇴를 하신 후에

1961년 11월 1-3일간 경동교회에서 회갑기념 강연이 있었다. 지원용의 “루터의 실존”, 문동환의 “쉘리 박사 교육원리와 한국교회”, 전경연의 “바르트의 성서해석학”의 강연 등이었다. 4일 토요일 오후 축하연에서 조승제 총회장의 “자유신학투사”, 한경직의 “새출발로”, 전영택의 “신과 동행자”, 홍현설의 “친구로 사귀다”의 축사, 김정준이 “생애와 사상”을 소개하였다.

우리 집안과의 관계는 1962년 초에 큰 아들 장일선이 EACC장학생으로 뉴질랜드로 갈 때 친절히 지도해 주셨다. 그곳에서 마치고 영국으로 가라고 하셨으나 못 가고 한국에 나왔다가 1968년에 미국 프린스톤을 거쳐 하트포트에서 Ph.D 학위를 받고 10년 만에 나와서 조향록 학장님의 요청으로 한신에서 구약을 맡았고, 언간 34권의 책을 쓴 바 목사님 생전에 늘 헌정하여서 크게 기뻐하셨다. 따로 내가 편집하는 구세공보절제호에 글도 써 주셨다.

김법린, 천관우 등과 함께 민주통일추진회 고문 때 작은 모임에 가끔 참석하였다. 김법린 회장은 말씀의 메모지를 돌렸지만 걸려들 말은 없었다. 1971년 서울아카데미에서의 7순 기념회 때도 “원했던 것은 아니나 모이니 기쁘다” 하셨다. 1970년 9월부터 45호를 내신 제3일도 애독하였다. 1971년에 7순 기념으로 나온 전집 5권은 소중한 것이었고 한권은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서 복사해서 보존해 갔다. 내 것은 현재 미국 콜럼비아 신학에 있는 셋째 아이 성식이 가지고 갔다. 나의 전집 축하편지에 10월 6일 답이 있었다.

5) 캐나다로 갔다가 다시 오심

김 목사님은 김연준씨가 경영하던 「대한일보」의 논설위원으로 계시다가 1972년에 타의에 의하여 캐나다의 식구들에게 합치게 되셨다. 거기 계시면서 내신 「제3일」을 몇 번 받아보았다. 우리 큰 아들 장 교수가 처음에는 일년에 두 번씩 미국에서 내왕했기 때문에 그 편에 몇 차례 편지를 드렸다. 한번은 익명(다른 이름)으로 한국으로 친필로 답을 보내시면서 81년 이후는 완전히 은퇴하신다고 하셨다가 캐나다에서 나오신 후 나는 연세대 회귀 사료실에서 만주에서 1937년 5월에 내셨던 십자군지, 기타 잡지의 글, 또 「편지에 대신하여」를 복사해 드렸더니 감사해 하셨고 「만우 송창근」이란 소책자에도 그 일을 언급하셨다. 1984년 12월 4일 오후 4시에 강원용, 장해천 동문의 도움으로 7유회(조선신학 7회생) 15명이 김 목사 내외분, 정대위 목사 내외분과 하룻밤 모임을 가져서 성만찬을 나누면서 김 목사는 부산피난 시절, 정 목사는 공직치리와 단절의 쓰라림을 말했다.

돌아가시기 바로 전에 김선목 씨 주선으로 수유리에서 함께 회식을 하면서 근자에 쓰신 글들의 초고를 보여 주셨다. 모두 새로 나온 전집에 들어 있다.

6) 세상을 뜨신 후에

1987년 1월 27일 소천 하셔서 한신대에서 기독교 장로회 총회장(葬)으로 모시었다. 1991년까지 세 번 기념 강연회가 있었는데 ① 1989년 3월 16일 경동교회에서 안병무의 “김재준의 사회 참여의식”, 유동식의 “풍유신학”이 있었는데 그는 김 목사를 평하여 기독교 2천년을 넘어서 반만년 한국에 처음 나타난 위대한 사상가라 하였다. ② 1990년 2월 2일 초동교회에서 윤기석 총회장의 “한 알의 밀알” 강연 ③ 1991년 4월 8일 한신교회에서 주재용의 “개혁신학과 한국교회”, 김용복의 “개혁 신앙과 한국 정치사상”이 있었다. 이장식 교수가 정성 드려 조사한 바 1957-1974년간의 그의 논문으로 「기독교사상」에 24회 「제3일」에 19회 「기독교세계」에 1회 「신학연구」에 2회 「십자군」에 14회 「사상계」에 3회 나온 것을 나는 다 읽었다.

7) 내게 끼친 감화

나의 오늘날 나 됨은 그에게 의지한 바 크다. 나는 「사상계」의 영구독자로서 전부 다 보관했는데 함석헌 옹의 영향도 컸다. 김 목사님은 “작은 것은 큰 것에 견주어서 생각하라”고 하셨다. 나의 분수를 깨우쳐 주신 것이다. 그가 미국에서 고학중 식당요리인 여자의 신경질을 받아주면서 냄비를 팽개치면 다시 주어다 주었다고 했다. 그러면 다음 다음 번에는 그녀가 사과했단다. 그녀의 주장은 “사물은 언제나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Every thing is always is own place)였다. 그는 그런 심성으로 사신 것이다.

8) 맺음말

1945-1958까지 장공이 목회하는 경동교회에 자주 못 가보았다. 사람을 쳐다 보지 않고 조용 조용 말씀하셨다. 기도, 성서연구, 전도를 많이 듣지 못했고 사생활도 모른다. 재리에는 밝지 않아서 「십자군」발행기금이 어려움을 당했단다. 번역의 시작은 영-일번역서 한 두권을 대조해 열독하면 문리가 트인다 하셨다. 문공부 부탁으로 「현대신학의 재형」의 번역 원고료를 받았다고 점심을 사셨다. 영어 통역은 못 들었다.

김 목사님의 천부의 은사는 말씀보다는 글을 쓰시는 것이었을 것이다. 김정준이 그의 고향, 출생환경을 자세히 설명하니 재주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하였다.(회갑기념 때). 그의 며느리의 글로서 그의 애향심을 보게 되었다. 전통과 환경 모든 것이 작용했을 것이다.

저의 형님도 장로이었고 다독하신 분인데 저희 집에 오시면 장공 전집을 뒤지고 메모하셨다. 아무리 단평이라도 생명력이 있다. 그의 잡지가 나올 때마다 초두부터 읽으면서 샘 솟아 나듯 분출되는 은총의 힘에 압도되었다.

9) 어디에서 그런 힘이 샘솟았을까

구세군은 푸른, 붉은, 노란색의 구세군 기를 쓴다. 푸른 것은 하나님의 성결, 붉은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 황은 성령의 감화를 상징한다.

김 교수는 전신전령이 하나님의 성결과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온전히 거룩하여 거룩한 삶을 살았다. 그러기에 그런 창작적 생명력을 보는 이의 심혼을 변개시키는 역사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그는 나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이다. 새해 머리에 “국민에게 드리는 글”이 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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