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4일 화요일

가운이 필요치 않은 분 / 서도섭

가운이 필요치 않은 분


서도섭(서울노회 공로목사)

「세계와 선교」에 그 동안 장공 회상이 회(回)를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어르신에 관한 이야기들이야 어찌 끝이 있겠는가? 결국 나 같은 사람도 그 한 구석을 채우게 됐다. 처음에는 사양했으나 끝까지 사양하지 않은 이유는 그 어르신의 숨결을 오래 오래 느끼게 하고 싶은 심정 때문이다.

실망스럽던 만남

시골 소년이었던 내가 피난지 항도 부산에 간 것은 한국신학대학(한신대학교의 전신)에 입학시험을 치기 위해서였다. 9회 졸업생이었던 매형(김종대, 후일 이남규 목사의 부목사로 목포 양동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복막염으로 처갓집에서 약 6개월 요양 중 1956년 별세)은 한국신학대학에 대한 소개보다는 장공 어르신에 대한 소개를 더 많이 했다. 나는 아직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은 그 어르신처럼 생겼으려니’ 하고 상상했다.

6․25 민족 상쟁의 와중에서 대학진학은 병역 보류의 유일한 길이었고 그것은 곧 전쟁에서의 전사상을 예방하는 생명안보의 마지막 보루였다. 말하자면 대학에 진학하면 살고 대학을 못 가면 죽음의 터로 가야 했다. 나는 입학시험을 치러 부산으로 떠났다. 강진에서 보성을 거쳐 여수까지 가서 부산행 화객선을 탔다. 이름이 화객선이지 요사이의 화물선보다 더 못했다. 그러나 나의 형편은 그런 것까지 짜증낼 여유조차 없었다. 나의 보따리 속에는 소중한 문서가 있었는데 그것은 매형이 김재준 목사님 앞으로 띄운 안부 서신이었다. 그 서신문 가운데는 시험 치러 가는 나(처남)에 대한 몇 줄의 소개가 있었다.

어쨌든 나는 이 서신을 가지고 하나님처럼 생겼을 김재준 목사님을 만나러 간 셈이었다. 그 어르신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섰을 때 어쩌면 나의 심장은 멎을 것 같았다. “김 목사님 계십니까?” 50대 초반의 초라하게 생긴 남자가 문을 열고 나를 의아하게 지켜보았다. 나는 그가 김재준 목사님이라고 짐작할 수는 없었다. 그 어르신 집에서 그 어르신을 시종 하는 사람쯤으로 여겼다. “김재준 목사님을 만나러 왔는데요” 했다. 그러자 “내가 김 목사인데 왜 왔지?” 하신다. 사기 당한 심정이었다. 아니 이분이 그 어르신이란 말인가? 아니 이 분을 매형은 그토록 혀가 닳도록 소개했단 말인가? 아니 하나님은 고작 이렇게 생긴 분일까?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간다.

매형의 안부 서신을 드렸더니 읽으셨다. 읽어 내려가시는 목사님의 표정을 눈여겨봤다. 멀리 산간 벽지에 시집 보낸 딸의 안부 서신을 읽는 친정 아버지의 체온을 느끼게 한 표정이었고 서신을 다 읽으신 어르신은 한결 친근하게 내게 대하여 매형에 대하여 물으셨다.

나는 돌아와서도 그 분이 정말 김재준 목사님이었단 말인가? 쉽게 수긍하고 싶지 않았다. 시골뜨기 소년의 환상은 자기가 제 멋대로 만들었다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가 그 어르신에게 실망하면서도 또 한편 홀려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40여년, 나는 그 어르신을 생각만 해도 계속 홀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 홀려 들어감은 나를 더욱 행복스럽게 했다.

단두대 앞에서도

나는 은혜 가운데 한 학기를 마쳤으나 신경통으로 6개월 동안 사경을 헤매었다. 1953년 환도한 서울의 한국신학대학에 복학했다. 다 아는 일이지만 경기 노회(그때에는 서울도 경기노회에 속했던 것)가 둘로 갈라서느냐, 하나로 지속되느냐의 의 진통을 겪고 있었다.

1954년 5월 어느 날, 새문안 교회당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총회의 결의이니 결의를 일반 받아들이고 나중에 조사하자는 측과 목사는 노회에 속했으니 죽이든지 살리든지 목사의 신상문제는 노회가 조사, 조치해야 한다는 양론이 시간이 흐름과 함께 가열됐다. 비록 신학생 신분이었지만 30대 초반의 강원용 목사님의 불을 토하는 듯한 열변은 극찬할 만했다.

그러나 사태는 심상치 않았다. 결정적인 순간에 노회장 한경직 목사는 부회장 전필순 목사에게 사회봉을 맡기고 내려갔다. 함께 유학을 했다고 들은 한경직 목사가 끝까지 친구 김재준 목사를 붙잡아 주려고 아니한 것이 어린 마음에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다. 전 목사님은 전격적으로 표결에 붙였고 곧 이어 정회를 선포했으며 회원과 방청인들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 때 서기 박한직 목사님이 단상에 뛰어 올라가 “회장이 잘못 판단하여 정회를 선언했으니 곧 다시 나와 회무를 처리하실 것이니 요동하지 말고 그대로 앉아 계십시오” 했으며 곧 이어 “끝까지 나오지 않으면 규칙에 따라 서기가 회무를 진행한다”고 선포했다.

이렇게 하여 경기노회는 둘로 갈라졌고 그날 밤 나는 분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런데 다음날 그 어르신은 다 듣고 알고 계셨을 터인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얄밉도록(큰 결례의 언사이지만) 태연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더 속이 상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큰 뜻을 조금 깨달을 것 같았고 언젠지는 모르겠지만 그 어르신의 기(氣)가 나에게도 스며든 것 같다.

이야기가 곁길로 나간 듯하지만 1970년대 후반, 문교부는 한국신학대학에 휴업령을 내렸다. 휴업령이 해제되려면 문동환, 안병무 두 교수의 면직과 여섯 학생의 제적 지시를 이사회가 받아들여야 했다. 거부하고 버티면 수업일수가 부족하여 유급 사태가 생긴다고 목을 졸랐고 이사 중에서 이 안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열변하는 이도 있었다. 김정준 학장은 쓰러질 듯 하면서도 버티어 나갔고 생명은 존속됐다. 하루걸러 긴급 이사회가 퇴계로 한신 빌딩(지금 매각 처분되었지만) 희의실에서 소집되었다. 옆의 사무실은 보도기관과 정보기관 사람들로 메워졌고 회의실에 도청 장치쯤 가설됐으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가장 연소했던 나는 학교가 폐교 당해도 교역자는 양성될 수 있다는 것이요, 꼭 학위가 있어야만 교역자 노릇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역설했다.

이사회 정관은 재적 과반수가 의결 정적수요 특별한 사안은 3분지 2이다. 말하자면 다수결로 밀어붙이지 말고 합의에 의해 결의한다는 뜻이다. 문교부 측에서는 신학생들이니 주일 교회 봉사도 수업일수로 계산하니 5일 내, 3일 내에 받아들이면 된다는 회유였다. 버티다가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됐다. 이사들 모두의 얼굴 피부가 찢어질 듯 초긴장된 가운데 희의가 시작됐다. 이사장께서 이 안건은 매우 중대하니 기립 표결하겠다 선언하시고 문교부 안을 받아들이자는 동의 재청에 가하신 이사는 기립하라고 하셨다. 내 앞에는 안기중 이사가 앉았는데 그도 나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최문환, 강정애(두 분은 다 고인이 됐다)두 이사도 일어나지 않았다. 얼마나 좋았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런데 1분도 못 되어 두 이사가 일어서 버렸다. 나중에 듣기로는 강정애 이사가 몹시 괴로워하므로 최문환 이사가 눈치를 하여 함께 일어섰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안기중 이사에게 눈 불총을 쏘았다. 일어나면 너도나도 죽는다는 심정에서였다.

이사장은 노하셨다. 지금 생각으로는 풋내기의 만용 같은 것이겠지만 “아니 치욕적인 결의를 하면서 기립표결을 하자는 데 여기는 반대할 권리도 없습니까?” 토하듯이 외쳤다. 족히 3, 4분은 침묵이 흘렀다. 다른 이사들이 없던 것으로 하고 만장일치로 희의록에 쓰도록 종용했다. 나는 그 날 두 교수와 여섯 학생에게 큰 죄를 범했고 따라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 일로 찬성한 이사 몇 분에게 불미스런 엽서 사건 등이 생겼다. 나 같은 것이 어떻게 그 살벌한 상황 아래서 초지일관 불이익이나 위협을 견디어 낼 수 있었을까? 단두대 앞에서도 초연한 그 어르신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미행한 기관원에게 차를 먹인 어르신

박정희 때 정부는 온 국민의 노도 같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 회담을 조급하게 체결하려고 했다. 그 때에는 하나님의 선교란 말이 아직 유행되지 않았으나 어르신은 모름지기 하나님의 선교 제일선에 나서였다. 회합과 성명, 방송과 신문 등에 신명을 바쳐 섬기셨다. 기관원은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아쉬운 것은 그 때 그토록 열성적이었던 분들 가운데 후일 노선을 바꾸고 그 어르신을 간접적으로 비난하는 것을 볼 때 마음이 아팠다. 기관원이 그림자처럼 따라 다닌다는 것은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다. 경험한 사람은 누구나 공감한다.

지금은 70고개를 넘기신 분이지만 그분은 어느날 아마 장공 어르신과 함께 회합을 마치고 식당을 가셨던 것 같다. 그런데 이분은 기관원을 피하여 식당을 빠져 나가 기관원을 따돌리는데 성공하셨다.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다 지쳐 먼저 귀가한 분께서 사람 걱정 끼친다고 투정하시니까 어르신은 내가 어떻게 왔기에 그러는가 하시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는 것이다.

그 어르신은 기관원을 따돌리려고 하지 않고 품에 안고 다니셨다. 버스를 타고 귀가하실 때 오히려 기관원에게 “고충이 많지?”, “지혜롭게 처신해!” 하셨다 한다. 귀가하신 것을 보고 돌아가려는 기관원에게 “들어와 차 마시고 가라” 하시며 사모님에게 차를 끊여 오도록 하셨다. 때로는 신문사에 보낼 원고의 교정을 부탁하여 결과적으로는 그 말단 기관원의 보고 자료를 얻게 해 주시기도 하셨다.

옛날 일본의 명장이 그의 목을 노리는 자가 그의 단골 이용소에 면도사로 취업한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명장은 면도할 때 천장이 무너질 만큼 큰 소리로 코를 골았다. 밀명을 받은 그 면도사가 기가 질려 죽이지 못했다고 한다. 그 어르신은 그 명장 보다 더 큰 담력을 가졌다고 여겨진다. 사모님이나 측근에게 그 어르신의 놀란 모습을 본 일이 있는가 묻고 싶다.

거슬러 올라가 동자동에서의 재학시절 남대문 쪽으로 가던 나는 남대문 쪽에서 걸어오고 계신 그 어르신을 노상에서 뵈온 적이 있다. 그 깡마른 체구에 낡은 구제물자 같은 의상, 그나마 오른 손을 윗옷 주머니에 넣고 걸어오고 계신 그 어르신은 분명히 시골뜨기, 그것도 저 산골짜기에서 숯이나 굽다가 나온 시골뜨기 같았다.

나의 인사에는 반갑게 반응하시지 않으신 목석 같으셨던 그 어르신, 졸업식 순서지에서 내 아내의 졸업 후 희망란에 결혼이라고 그 누가 써넣은 것(아마 정웅섭의 업적?)을 가지고 그 어르신께 찾아가 앙탈부리니 응석으로 받아 주시려고도 아니하신 무표정(?)하셨던 그 어르신, 요사이 박사 칭호로 설교하기를 원하고 박사 가운을 어디서나 입으려는 풍조를 보면서 나는 가운이 필요치 않으셨던 그 어르신을 회상한다. 그 어르신은 때로 졸업식 때 가운이나 관복을 입은 적이 있었으나 그것보다는 낡은 옷차림에 오른 손을 주머니에 넣고 걸어오시는 모습이 훨씬 어울린다. 사실 복음서 어디에도 예수께서 가운을 입고 가르쳤다는 기록은 없다.

흐트리지 않고 마감한 하늘의 사람

나는 그 어르신이 한양대학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몇 차례 문병간 일이 있다. 당뇨병 때문에 그의 며느리가 철저한 식이요법을 썼다. 그런데 한 번은 출타했다가 돌아와서 보니 사모님께서 금기된 식품을 그 어르신께 드렸으며 그 어르신 역시 맛있게 잡수시고 계셨다는 것이다. 며느리는 안타깝고 기가 막혔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나는 어르신의 인간스러움에 또 한 번 감동했다. 아 저 어르신에게도 보통 사람과 똑 같은 욕구나 정서가 있구나!

그러나 역시 그 어르신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무서운(?)면이 있다. 그는 죽음을 며칠 앞두고도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쓰셨다.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어르신의 아들 김 장로에게 “오늘 저녁은 넘길 수 있을 것 같지만 임종이 오래 남은 것은 아닌 것 같다”고 귀뜸해 주었다. 나는 그날 밤 섬에 있는 요한 사도의 모습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인상을 그 어르신의 얼굴을 지켜보면서 느낄 수 있었다. 상가 집이나 중병 환자에게 가는 것을 중지한 아내가 그 어르신을 하도 보고 싶어하기에 갔다 오라고 했다. 생명의 불꽃이 시들어 가는 것을 보고 돌아 온 아내는 며칠 동안 건강의 균형을 잃었다. 그것은 아내가 나보다 더 그 어르신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며 이 회상록은 나 보다 아내가 써야 더 실감 날 것도 나는 잘 알고 있다.

어쨌든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의 삶의 발걸음을 흐트리지 않고 사시다가 생애를 마감하신 하늘의 사람, 그 어르신을 스승으로 모셨던 것을 큰 자랑, 큰 영광으로 여긴다. 소크라테스의 임종에서나 느낄 수 있는 어떤 경외감을 그의 장례 절차를 통해 나는 수 없이 느꼈다. 내가 선배들을 통해서 송창근 목사님을 아는 것처럼 이 글을 통해서 젊은 나의 후배들에게 작은 도움을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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