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8일 화요일

[0401] 기독교의 기본문제 - 신앙의 생태(히브리 11:1) - 1955년

기독교의 기본문제


1955년

신앙의 생태(히브리 11:1)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못한다”고 (히 11:6) 했습니다.

믿음은 종교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과학은 이미 주어져 있는 객관적인 자료들을 실험함으로써 그 학을 성립시킵니다. 철학은 이미 주어진 인간의 이성을 사용하여 관념적 논리로 제반사위의 ‘어떠할 것이다. 어떻게 되어야 하겠다’ 하는 것을 규정지어 그 학을 구성합니다. 그러나 종교는 사물의 존재 이전의 세계, 인간 이성을 초월한, 논리의 탑이 닿지 못하는 세계, 말하자면 절대, 絶對他者(절대타자), 궁극의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니만치 실험도 논리도 그 앞에서는 소용없게 됨과 동시에 그 대신 ‘신앙’이라는 새 길을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실험할 수 있는 사물의 세계만에 만족하거나 자신의 이성권내에서 깨끗이 체념할 수 있다면 인간으로서의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동물의 세계에서와 같이 기형적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存在’(존재)에서 ‘초존재’를 추구합니다. 시간에서 영원을 동경합니다. 사에서 영생을, 의존자로서 지존자를 피조불로서 창조주를, 상대로서 절대를 찾아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자이기 때문에 종교는 언제나 인간과 함께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세계는 과학자의 실험대 위에 오르지 않고 철학자의 사유권 안에 들어오지도 않기 때문에 근본적인 모험과 비약을 감행하는 ‘신앙’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무시하거나 종교를 박멸하려는 것은 인간성 자체의 가장 근본적인 것을 박멸하려는 것이어서 정녕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어떤 분은 “나는 무종교, 무신앙자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따져보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간에 온전히 무종교? 무신앙한 분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어떤 기성종교의 테두리속에 들어와 있지 않다는 것 뿐입니다. 그는 반드시 무엇에 의지하고 삽니다. 무엇을 절대라고 믿고 삽니다. 그것이 ‘돈’일 수도 있고 ‘애인’일 수도 있고 ‘무슨 이상’일 수도 있고 ‘국가’일 수도 있고 ‘자기’일 수도 있고 ‘제 자녀’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가 무엇을 믿고 사느냐가 문제요, 믿느냐 안믿느냐가 문제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돈과 하느님을 함께 섬기지 못한다”는 둥, 사도들이 너희는 “배로 네 하느님을 삼는다”는 둥 하는 말은 다 그런 것을 ‘종교’화 하고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결국 따져보면 우리가 ‘창조주’를 믿지 않으면 ‘피조물’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피조물숭배’가 곧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성경중에 ‘愛(애)의 찬가’는 고린도전서 13장에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찬가는 오늘 읽은 히브리 11장에 적혀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을 규정하여 말하기를 “믿음은 보이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실상’이란 말은 헬라어의 ‘후포스타시스’여서 영어로는 “Substance or Reality”라고 번역합니다. ‘본질’ 혹은 ‘실재’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 즉 소망의 본질, 혹 실제”라는 말입니다.

크리소스톰은 이 구절을 설명해 말하기를 “우리의 부활은 아직 소망이긴 하지만 실재는 아니다. 그러나 믿음은 우리의 영혼 안에서 그것을 실재화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믿음은 우리를 시간의 연속에서 끄집어내어 영원한 세계에 높이 올리는 것이며 거기서는 미래도 현재와 똑 같이 실상이다” 하였습니다.

애급에서 파낸 ‘파피루스’ 중에서 밀리캔 박사가 발견한 바라 하여 소개된데 의하면(Dean Inge) 이 ‘실상’이라고 번역하는 헬라어 ‘후포스타시스’를 법적으로 사용할 때에는 ‘토지문권’ 즉 요새로 말하면 ‘소유권보존등기’와 같은 뜻으로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말은 ‘바라는 것들에 대하여 보존등기를 해가지고 있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 되어 따라서 ‘보지 못하는 것들(미현물)의 증거’라는 것도 자연스럽게 통해지는 것 같습니다. 하여간 재미있는 해석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 히브리인서에 정의된 ‘신앙’은 구약적인 것이어서 무슨 ‘것들’(“Things hoped for”, “Things not Seen”) 이라고 되어 있으나 이것이 신약에 와서는 ‘것들’이 아니라, 그 ‘이’ 즉 ‘산 인격’이 신앙의 대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라는 그 ‘이’를 믿고, 보이지 않는 그 ‘이’를 보는 눈이 믿음이며 그 ‘이’의 말씀에 ‘아멘’하고 응답하며 전 존재를 바쳐서 순응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렇게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그 마음 안에 점거하고 계시게 된 크리스찬 신앙의 소유자는 과연 어떠한 생태를 보이고 있는가? 이것을 오늘 말씀드려 보기로 합시다.

(1) 이 믿음 있는 자는 ‘일소부재’의 순례자와 같이 계속 전진하며 위험합니다. 소위 철저한 ‘보수파’가 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입니다.

서기 1492년에 콜럼버스가 一葉片舟(일엽편주)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미대륙을 발견했습니다. 철학자 산타나야는 말하기를 “콜롬버스는 하늘을 판독하는 믿음 이외에 다른 항해지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믿음 있는 자의 생태를 잘 그려낸 말입니다. 믿음은 ‘안전제일’ 주의에 주저앉지 않습니다. 어떤 기성세력에 안도하여 아랫목에 자리를 펴고 들어 누우려는 소위 정적인 ‘안심입명’파가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유명한 설교자가 말하기를 그리스도교 신앙의 제일 큰 원수는 ‘凡庸’(범용, Mediocrity)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은 ‘平凡’(평범)한 삶이 아닙니다. 비상한 것을 전취하려는 모험입니다. 백척간두에 또 한걸음 내 디디는 전진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언제나 ‘위기’를 내포하는 것입니다.

싹맨 박사(Ralph W. Sockman)의 설교에서 이런 재미있는 引例(인례)를 읽었습니다. 1886년 미국정부 노동국장이 국내ㆍ국외의 정세를 시찰하고 보고하기를 “필요한 철도, 운하, 통신, 상선 등이 다 완비되었다. 지금부터 50년 동안은 새 것을 만들 필요가 없다. 이미 시설한 것만 가지고 안락하게 살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당분간은 신발명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어느 때냐 하면 토마스 에디슨이 39세, 헨리 포오드가 23세, 촬스 스타인멧즈가 21세, 퀴리부인이 19세, 로버-트 밀리캔이 18세, 오빌 우리이트가 18세, 말코니가 12세, 아인슈타인이 7세 때였다 운운 하였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지금도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고 예수께서 안식일에도 병을 고치신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졸며 쉬지도’ 않으시므로 신자도 부단히 전진하는 것이 그 생태인 것입니다. 믿음은 소망의 줄을 타고 자라나는 생명의 첨단에서 불붙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불교적인 영향이 있어 그런지 몰라도 잘믿는 사람은 부처님처럼 다리를 도사리고 앉아서 영원에 통하는 운명을 명상하는 고요함에서 그 점잖음을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을 동적인 것에서보다도 정적인 데서 찾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크리스찬 믿음의 본성이 아닙니다.

(2) 믿음 있는 자는 새 것을 창건합니다. 그리스도는 새 언약을 세우고 새 사람을 만들고 새 인류를 지어가며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표어로 새 기구를 의도했습니다. 그는 만물을 새롭게 한다. 종말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어 의와 사랑과 영원한 생명이 머무는 세계를 완성하여 선물로 남긴다고 그 몸을 던졌습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찬 신앙이 움직이는 곳에는 반드시 무슨 새 생명이 싹트는 것입니다. 무슨 새롭게 하는 운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이화(梨花)에도 새로운 ‘누룩’의 건건한 건설적인 운동이 태동하고 있음을 봅니다. 거기에는 온 세상이 혼탁해도 혼탁하지 않은 손으로 웅키어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 맑은 샘물터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어떤 교에서는 ‘신’자만 붙으면 질겁을 하고 ‘신’신학이라면 악마라고 배척합니다. 그저 옛날 것을 온전히 그대로 무비판하게 받아서 그것을 후대에 전해야 한다고 극성을 부립니다. 옛 것이라고 다 나쁜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언제나 ‘시대’가 새로우면 ‘그 표현과 대책과 응답’이 또 ‘새’ 호흡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공자님의 말씀이 50년전이나 지금이나 옳은 데는 마찬가지겠지요 그러나 50년전 유학자가 갓쓰고 도포 입고 갓신 신고 팔자걸음을 하면서 전선의 지도자 노릇하던 그 용어, 그 기분, 그 태도, 그 생리와 분위기를 그대로 가지고 오늘의 성균관대학 교수가 되려면 웃음꺼리 밖에 남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회에서도 그런 막힌 생각으로 생생한 후진을 망치려 하려는 데는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믿음은 전투행위입니다. 도피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철저히 싸우며 철저히 이기는 전투로 나타납니다. 그리스도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항거하여 최후까지 싸웠습니다. 그는 패배주의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장부가 되라” 하고 바울은 외쳤습니다.

‘楚辭’(초사)에 쓰인 굴원과 어부의 대화는 동양인의 난세에 처하는 태도를 잘 드러냈습니다. 굴원은 ‘강호’에 은둔했습니다. 세상이 다 탁한데 나 혼자 깨끗하고 세상이 다 취했는데 나 혼자 깨었으니 내 어찌 이 조출한 몸을 더러운 데 섞겠느냐? 하는 것이 굴원의 말이었습니다. 어부는 ‘與世推移’(여세추이)를 권했습니다. 세상이 다 취했으면 나두 취한 척 하면서 어울려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앙의 소유자는 세상이 썩었으면 소금 노릇을 하고 세상이 어두우면 등불 노릇을 하고 세상이 맹숭맹숭하면 누룩노릇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십자가가 온다. 그것이 그대로 네 영광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그대로 천국이 되어있지 못하는 한, 그리스도 신앙자는 부단히 도전해 나아갑니다. 수도원으로 피하지 않습니다. 초대교도들을 보십시오. 새 로마제국을 향하여 수십만 순교자의 피를 심어가며 싸워 이겼습니다. 청교도들은 영국에서 혁명에 이겼으며, 신대륙에 미국을 세웠습니다. 무지한 자를 보고 계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병약자를 보고 병원을 시설하지 않고는 못견딥니다. 불의에 굴종함을 영리하다 하지 못합니다. 인간들의 모든 문제에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더럽고 망할 세상이라고 도피할 작정이라면 그리스도는 결코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신앙의 소유자는 신비적인 도취경에는 투입하지 않습니다. 신비주의는 ‘神人一如’(신인일여)를 즐깁니다. 그 도취경에는 ‘세상’의 현실이 계산에서 빠집니다. 그는 하늘에 직통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은 어디까지나 현실적입니다. 역사적입니다. 어디까지나 ‘현실’을 더 큰 ‘현실’로 극복 성취하려는 행동입니다. ‘혼돈무형’한 가운데서 ‘질서와 형태’가 창조되었다는 창세기의 창조설화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영력으로 현실을 창건해가는 생활입니다.

우리나라 신자들 중에서는 초세간적이면 신령하다고 양과 같이 그저 얌전하고 무사하면 잘 믿는다 하고 바리새인같이 무슨 법률조문이나 관습이나 지키면 그만인 것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앙자는 어디까지나 선으로 악을, 眞(진)으로 僞(위)를, 美(미)로 醜(추)를, 건설로 파경을 이기어 그 능동적인 그리스도의 贖良(속량), 건설적인 자유를 그 생의 투쟁으로 증거하며 그 무덤앞의 십자가가 그의 일생을 실질적으로 표시한 기록이 되게 하는 전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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