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8일 화요일

[0401] 기독교의 기본문제 - 크리스찬의 기본원리(마가 1:14-15, 로마 10:10) - 1955년

기독교의 기본문제


1955년

크리스찬의 기본원리(마가 1:14-15, 로마 10:10)

우리는 설교를 듣고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얼마 알고 있습니다. 적어도 아는 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설사 우리가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얼마 안다 셈 치더라도 ‘그리스도’ 자신은 모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또는 우리가 칸트나 헤겔에게서처럼 그리스도적 철학의 얼마는 알고 있으나 살아계신 그리스도 자신은 만난 일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의 그림이나 환상은 보았어도 그 실존적인 그리스도는 못 보았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자주 들은 동양 이야기 가운데 어떤 화가가 용을 사랑하여 밤낮 용만 그리고 있었는데 하루는 정말 용이 그의 화실에 꿈틀꿈틀 기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질겁을 했다는 말이 있는 것과 같이 우리가 밤낮 예수님을 운위하면서도 기실은 예수님의 화상만 감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날 사도들이나 초대 교우들처럼 살아계신 예수님 자신을 만나는 제일 기본되는 길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때로는 조상 때 우물을 다시 파야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1) 그 첫째는 ‘회개와 신앙’ 입니다.

‘회개’라는 것은 아주 근본적인 전향, 철저한 전복을 의미합니다. 아주 뒤집어 엎는 현상입니다. 그렇다면 현대인도 이런 것을 필요로 할 것인지가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나려면 이 고비만은 절대로 빼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도 그랬지만 예수님도 맨처음 외친 소리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나면서부터의 인간, 자연질서에 속한 정욕 중심의 인간생활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살까? 그리고 더 안일하게 더 편리하게 더 즐겁게 더 문화적으로 더 고상한 취미를 가지고 살자는 것이 그 기본형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현대의 세련된 문화인 타입을 그대로 연장시키면 천국에 들어간다고 자신하는 모양입니다. 미국과 같이 마천루를 건축하고 세계 제일의 다리를 바다 위에 늘어놓고 먼지하나 없는 신작로의 흰 줄이 수만리의 산과 벌판에 거미줄같이 늘여지고 아름답고 평화스러운 마을, 붉은 지붕과 흰벽의 아담한 ‘홈’들이 숲속에 그림같이 잠들어 있는 광경에 취하여, 아 이것이 천국이니 또 다시 초월한 천국을 바랄 것 무어냐! 하고 찬탄하게 됩니다. 이리하여 현세에 만족하고 육신에 만족하고 문화에 만족하고 이러한 인간성 자체에 만족한 것이 세련된 로맨티시즘이오 아름다운 세속주의라 할 것입니다.

여기에도 그리스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어도 문화적으로, 한 고상한 취미로, 문화인의 한 세련된 감각으로 믿는 것 뿐이요 ‘죽어서 사는’ 역설적인 위기를 통과한 믿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생명이 물질의 풍부한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이기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네 부모나 자녀나 재산을 미워하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내가 땅위에 화평을 주려 온 줄로 알지 말라. 도리어 싸움을 일으키려 왔다” 등등은 세속질서를 온전히 뒤집어 놓는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회개’라는 말은 반드시 낡아빠진 어휘만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절망에서 허무에 전락하느냐 돌이켜 새 하늘과 새 땅을 차지하느냐의 최후통첩을 받고 있는 위기에 당면하고 있습니다. 저 공산당들도 옛 것을 그대로는 쓸 수 없다고 소위 ‘세뇌’(洗腦, Brainwash)를 강행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성 자체로서의 인간이 온전히 ‘다시 남’을 요구합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옛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온전히 죽이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새 사람으로 다시 산다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세속적인 것을 아무리 세련시켜도 그것으로 천국에 통해지지는 못하는 까닭입니다. 헌대에 있어서도 여전히 ‘회개’는 크리스찬 생활의 첫 기반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를 믿으라’ 하였습니다. 과학적 실증에 의한 지식이 현대인의 유일한 확실성이요 ‘믿음’이란 것은 무지의 대용어에 불과하다고 비웃어 버립니다. 그러나 ‘믿음’의 기반 위에서만 지식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믿음’의 가장 뚜렷한 특정은 ‘인격적인 신임’(personal commitment)일 것입니다싹맨 박사의 설교에 인증된 예화에도 있습니다만 가령 어떤 병자가 있어 말하기를, 나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모든 의사들의 처방전을 다 받아지고 그것을 비교 연구한 다음에 입원할 병원을 결정하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태도입니다. 병자는 의사를 신임하고 그에게 맡기고 순종해야 합니다. 병자가 의사를 의심하고 비평만 한다면 그는 치료를 단념할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인간 종국의 문제 인간의 구원이라는 인간 이상의 능력자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는 문제를 ‘믿음’ 없이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의 선을 넘어 가면서도 지식이니 실험이니 실증이니 하고 있을 여유가 있겠습니까? 위기에 직면하는 때 하느님과 그 독생자 그리스도를 믿고 그에게 전 존재를 내어던지는 ‘인격적 신임’ 밖에 다른 취할 길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믿음은 여러분 하나 하나와 그리스도 자신과의 인격적 응답입니다. 요새 흔히들 말하는 소위 ‘나와 당신’(I-Thou relation) 관계와 ‘나와 그것’(I-It)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Speaking about Him)이 아니라 ‘그에게 이야기하는 것’(Speaking to Him)이라고 합니다. 가령 여기에 ‘박’이라는 사람과 ‘김’이라는 사람이 한자리에 앉아서 ‘최’라는 사람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고 합시다. 그들은 ‘최’가 보기 싫게 생겼다는 둥, 심술 사납다는 둥, 그래도 취할 점이 있다는 둥 하며 맘 놓고 이야기의 꽃을 피웁니다.

그때 갑자기 ‘최’라는 그 당자가 그 방에 쑥 들어온다고 합시다. 그 순간 그들은 지금까지와 같은, ‘최에 대한’ 이야기를 더 오래 진행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이야기에는 일종의 위기가 온 것입니다. 왜 그럴 것입니까? 지금까지에는 ‘박’과 ‘김’이 ‘최’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습니다. ‘최’ 자신이 아니라 ‘최’를 물상화(Objectify)한, 산인격 아닌 ‘최’라는 개념을 상대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제멋대로 조심성 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최’ 자신이 그 앞에 있기 때문에 ‘최’에 ‘대하여’가 아니라 ‘최’와 또는 ‘최’ ‘에게’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물상’으로서의 ‘최’가 아니라 ‘인격’으로서의 ‘최’ 즉 주격과 주격의 대좌로서의 ‘최’를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삼자적인 입장에서, 관망적인 태도로 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너’와 ‘내’가 대좌한 위기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에 ‘관한’ 교리니 신조니 하는 것을 시인하는 정도의 말하자면 ‘그에 대한’(About Him) 태도가 아니라, ‘그에게’(To Him)의 태도입니다. 내가 그를 만나 그와 대좌하여 그에게 나의 전 존재를 맡기고 그에게 순종하는 전적인 결단을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가장 직접적인 표현은 ‘기도’입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경계하신 소위 ‘중언부언’ 하는 기도란 것은 실존적으로 하느님께 아뢰는 태도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 마취적인 주문 외우듯 하는 기도를 의미한 것이어서 이런 것은 그리스도교적인 기도라 할 수 없습니다.

(2) 둘째로는 증언과 생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경험한 사건과 받은 바 멧세지를 반드시 증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내가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목숨걸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증거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하고 찬탄합니다. 그리스도가 내게 보여 주시고 말씀해 주시고 만들어 주신 사건을 내가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어 산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내’가 제삼자적 입장에서 그리스도에 관하여 증거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인물을 냉혹한 사실대로 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는 그리스도 나의 그리스도, 내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 즉 ‘복음증거’는 증거하는 멧세지가 증거자 자신의 생활에서 분리될 수 없습니다. 나쁜 사람도 좋은 의자를 만들 수 있는 것과 같이 악한자도 좋은 설교는 할 수 있다고 안심해서는 안됩니다.

얼마전에 미국 필라델피아에 ‘네 사람의 군목’을 위한 기념 예배당이 건설되었다는 소식이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런 것이라 합니다. 제2차 대전 중 미국 군함이 대서양을 건너다가 태풍을 만나 파선되었는데 그 배에는 유대교 군목 1인, 카톨릭 군목 1인, 신교파 군목 2인이 탔었답니다. 파선되어 배는 가라앉으려는데 구명대를 못가진 사병들이 있었습니다.

이 군목들은 자기네의 구명대를 그 사병들에게 메워주고 그들이 구명정에 다 옮겨진 때 이 네 군목은 갑판위에서 넷이 서로 손을 잡고 머리를 숙여 조용히 기도하며 배와 함께 물속에 잠기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명철한 장군의 지휘와 참모로 승전한 것을 자랑합니다. 군대 위문온 세계적 명가수를 미친듯이 환영합니다. 그려나 이런 군목의 행위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표시합니까? 우리는 손벽칠 수도 없고 만세부를 수도 없고 훌륭하다고, 떠들며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행위에 직면할 때 무슨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닌 ‘거룩’한 무엇에 위압을 느낍니다. 우리가 다 이기주의자라 할지라도 이런 전혀 비이기적인 행동에 부딪칠 때 우리의 어느 한구석에 숨어 있던 비이기적인 무엇이 거룩한 응답을 하는 것입니다.

이 네 군목은 그의 그리스도인다운 죽음의 결단으로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길이길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진 때 ‘더 많은 말이 필요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의 십자가가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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