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8일 화요일

[0401] 기독교의 기본문제 - 그리스도교의 특징(요 3:16) - 1955년

기독교의 기본 문제


1955년

그리스도교의 특징(요 3:16)

세계에는 허다한 종교가 있으며 그 허다한 종교들이 제각기 특색이 있고 거기 따르는 신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거짓 종교와 참 종교의 구별이 있다 할지라도 하여튼 종교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안에도 각양각색의 종파가 있어서 각기 자기 종파가 제일이라고 믿습니다. 거기에는 거짓 그리스도교도 섞여 있어서 더 열심히 방송합니다. 지금은 잡음이 너무 많아서 정확한 ‘뉴우스’가 옳게 들리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적측 방송을 자기네 방송인줄 알고 잘못 따라가기도 하며 잡음에 진저리나서 도대체 듣지 않기로 작정하는 사람도 있고 또 잡음이나 참 ‘뉴우스’나를 둘 다 똑같다고, 그 진상을 규명하기도 전에 아주 자기만이 ‘독야청청’한체 하려는 초월한 태도를 취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래의 ‘참복음’, 기쁜소식을 우리에게 똑바로 전해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공중에 권세잡은 자’가 방해방송을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인 줄을 알고 기어코 참 그리스도교를 분간해 들으려는 지혜로운 신도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요한복음 3:16절을 읽으면서 그리스도교의 뛰어난 본색을 찾아보기로 합시다.

(1) 인간적인 종교, “하느님이 세상을……” 하느님, 창조주시요 온 우주의 주재자신 살아계신 거룩한 하느님께서 ‘세상’ 즉 이 ‘사바세계’라는 ‘인간들의 사회’를 먼저 찾아 오시는 소식. 그리고 “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부르시는 ‘말씀’에서 그리스도교는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진실로 ‘너’와 ‘나’의 대좌에서 생기는 ‘인간적’인 종교입니다. 종교들은 거의 전부가 외부적이요 의식적인 데에 그 소재를 찾으려고 합니다. 구약시대의 제사장 종교는 ‘성전’이라는 장소에서 ‘제사’라는 의식과 ‘제사장’이라는 교직과 ‘법률’이라는 책 위에 그 종교의 권위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권위의 존속은 ‘전통’의 힘에 의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런 외부적이요 물상적인 데에서 인간을 해방시켰습니다. “하느님은 영이시므로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여기서라 저기서라 할 것이 아니라 어디서든지 예배할 수 있는 때가 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 자체를 보고 거기서 무한히 고귀한 ‘영혼’을 발견하셨습니다. 영원에 통할 수 있는 가능성, 하느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게 될 함축성을 보고 계셨습니다. 옛 종교는 의식과 제도와 교직과 성문서를 인간 이상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명하여 거기에 절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우상숭배’라 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킨다는 데 굉장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안식일에는 병도 못 고치고 먼 길도 못가고 음식도 못해 먹고 - 하여튼 그 번거로운 세칙 중 어느 하나라도 범하면 벌받을 것을 무서워 전전긍긍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人子(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고 “안식일에 사람을 위하여 선을 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고 그날에도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에게 가장 귀한 보배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천하를 얻은 대제국의 영화보다도 한 타락한 인간을 건지는 것이 더욱 큰 일이었습니다. 땅위에서 죄에 허물어진 인간 하나가 바로 잡혀지는 때 천상에서 천군천사의 기쁜 잔치가 벌어진다고 그는 하셨습니다. 그는 ‘不學無識’(불학무식)한 갈릴리 어부들에게서 대사도의 가능성을 보았고 창기와 세리와 방랑하는 광인과 문둥병자에게서도 하느님 아들 딸의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 하나 하나의 인간 고뇌와 죄괴를 자기가 온통 짊어지고 이 사람들 하나하나를 구원하려는 대원에 살고, 죽고, 다시 살으셨습니다.

이 인간이 악을 행하고 죄를 범하여 하느님의 뜻을 역행하면 그처럼 무서운 것은 또한 없습니다. 그는 전우주에 파탄을 일으키고 하느님의 심장에 화살을 꽂는 것이어서 가장 무서운 것이 인간의 범죄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 죄인의 속량에 그의 피의 마지막 한방울까지 땅에 쏟았던 것입니다. 그의 종교는 철두철미 ‘인간성 재건’의 종교였습니다.

5억, 6억의 돈을 들여 그것으로 제일 큰 돌집 예배당을 짓고 그것을 자랑하며 거기에 만족하고 그곳에서 산출되는 인간들 하나 하나의 ‘품격’에 대하여 등한하다면 그것은 결국 ‘성전’주의의 제사장 종교에 가까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가리키며 “돌 하나도 돌 위에 겹놓이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 하시며 참 ‘성전’이 있으니 그것은 내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정통신학이니 정통교리니 하여 그것으로 그리스도교의 최고표준을 삼는 것은 그리스도교를 인격적인 데서 관념적인 데로, 영적인 데서 율법적인 데로, 자유하는 데서 종되는 데로 이끌어 가는 것이어서 하나의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영적이요 인격적인 주체와 주체의 응답이기 때문에 아무러한 ‘통’에도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신학이 있고 교리가 있어도 그것은 날마다 자라는 생명운동을 전제로 한 유기적인 조직이요 결코 고정주의적인, 외적인 보수, 정지된 ‘시스템’은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교회당 건축이나 교리옹호라는데 보다도 산 인간들의 아름다운 삶의 건축, 인간성의 그리스도적인 재창조에 더욱 큰 관심을 가져야 될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청년학생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은 한창 건설도상에 있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한 기원에서 생겨진 것입니다. 강원룡 목사가 학생운동에 나선 것이나 우리 교우들이 ‘장학회’ 사업에 열심하는 것도 이 ‘인간건축’에 기여하기 위함입니다.

(2) “이처럼 사랑하사……” 그리스도교는 윤리적인 종교입니다. 의로운 사랑의 종교입니다. 모든 그리스도교적인 품격, 생활은 이 ‘거룩한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종교에는 불교처럼 형이상학적인 것도 있습니다. 깊은 침묵과 명상에서 자기 자신의 ‘아트만’을 더듬어 본다거나, 모든 차별의 세계에서 해탈하여 ‘하나의 세계에 귀일한다’는 등의 종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선을 행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엄숙한 의무를 지는 종교입니다. 아름다움이란 것도 선인 때에만 그리스도교적이 됩니다. 진리도 선을 위한 질서인 것입니다. 요새 우리 한국의 어떤 교파안에서 너무나 무엄하게 횡행하고 있는 일종의 비윤리적인 경향은 이점에서 배척을 받아야 합니다. 그들의 밤낮 떠드는 말은 소위 ‘정통교리’를 옹호하기 위하여는 윤리적이 아닌 수단도 얼마든지 용허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정통교리 옹호의 미명하에서 거짓, 악선전 미워함과 저주와 불법 등을 당연한 일같이 감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이야 말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가장 파괴적인 ‘이단’입니다. 교리 자체가 선을 위한 질서인데 교리를 위하여 불선을 감행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너무나 심한 자가당착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들은 세상에 빛이라…… 사람들이 너희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였습니다.

우리 크리스찬의 가는 곳마다 윤리적인 변신이 따라야 할 것입니다. 죄가 은혜로, 악이 선으로, 부패가 신생으로, 침체가 생장으로 변해져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를 제물삼아 죽음에 붙이기까지 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은 모든 윤리의 원천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代死(대사)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찬의 전모습이 그리스도적인 사랑이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의 일을 할 것이 아니냐?” 하고 예수께서는 혈통을 자랑하는 바리새인을 책망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갑자기 생긴 ‘자유’에 뒤이어 가장 비참한 전쟁을 겪은 탓으로 윤리가 파산상태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중에서 ‘적은 무리’인 여러분 크리스찬인 그리스도의 생명에 불붙어, 간데마다 건전한 윤리적 원천이 되어 주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수고로 이 폐허에서 참 복음의 실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그리스도교는 세계적(Universal)인 종교입니다. 백인만이 아니고 흑인만이 아니고 인도인이나 한국인만도 아닙니다. ‘누구든지’ 어디서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습니다. 그리고 꼭같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자기를 높이려는 약점이 하도 많아서 부자나라 미국에서 나온 선교사면 ‘선교사’의 의식보다도 ‘달라’ 가진 미국시민이라는 의식이 앞서기가 쉬운 것 같습니다. 한국 크리스찬이면 크리스찬이란 것보다 한국인이라는 인식이 앞서고 일인도 역시 그리하여 마침내 국가가 하나님 위에 올라가는 망발을 저지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요새는 심지어 한국 안에서의 어떤 지방을 앞세워 가지고 이북이니 이남이니 평안도니 경기도니 해서 이런 지방의식을 크리스찬 의식 이상으로 염두에 두는 용렬한 현상까지 보입니다. 어떤 교파나 당파를 크리스찬 의식 이상에 두는 것도 그리스도교를 유대교로 끌어 내리는 경향입니다. 유대교에서는 지방적 인종적으로 종교의 국경을 그어서 이방인, 사마리아인, 유대인이 함께 예배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한방에서 제사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모든 인위적인 한계를 없애 버렸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도 이방안도 없고 종도 상전도 없고 문명인도 야만인도 없고 남자도 여자도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 동등이요 일체다” 하는 뜻으로 바울은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에큐메니칼’ 운동, 세계교회운동의 정당성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4) “그를 믿으면……” 그리스도교의 생명은 ‘그이’ 곧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영원히 살아 지금도 일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을 이루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였습니다. 어떤 유대인 학자의 말에 “예수가 말한 것으로서 유대교 ‘탈무드’에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는 아무 새 것도 말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낡은 교훈들이 어찌하여 예수에게 와서 세계를 변신시키는 새능력으로 변하여 다시 살아 움직이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의 주이시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의 안에서 성령의 감동함을 받고 그의 나라의 실현을 위한 성역에 동참한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신음하는 한국에도 그의 나라는 실현되고야 말 것입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