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8일 화요일

[0401] 기독교의 기본문제 - 그리스도교와 자유(갈라디아 5:1, 13-15) - 1955년

기독교의 기본문제


1955년

그리스도교와 자유(갈라디아 5:1, 13-15)

‘自由’(자유)는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과제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신앙에서 이에 대하여 이견(異見)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일반역사를 더듬어 볼 때 역사의 기록은 결국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 또는 자유를 잃어버릴까 무서워서의 투쟁기록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성경역사에서 볼지라도 성경의 기록은 결국 자유를 위한 사건들의 기록입니다. 출애굽기는 노예에서 자유에의 기록이며 사사기는 유목민족들 또는 가나안 토착민들의 침략과 압박에서 자유를 얻으려는 고투의 기록이었습니다. 열왕기도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바벨론 포수생활에서의 해방의 노래, 모든 불법과 죄악과 횡포에서 백성을 자유케 하려는 예언자들의 외침, 그리고 신약에 와서는 그런 외부적인 의미에서 보다도 더 근본적인 인간자체의 내적인 자유, 즉 인간성을 그 존재에서부터 파괴하는 죄와 사망에서 자유하게 하려는 그리스도의 구속이 곧 성서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성의 ‘자유’에 대한 존엄한 이해없이 성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감으로 우리 한국인, 아니 자유진영의 모든 우방인들의 당면한 투쟁에 있어서도 ‘자유’만이 그 가장 믿음성있는 필승의 방략입니다. 우리는 공산치하에서 쓰린 경험을 했습니다. 그들의 기관 통솔력과 운영능력 등에는 오히려 우리보다도 나은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근본적인 결함은 인간의 정신력을 과소평가하는 것과 따라서 인간의 가장 기본되는 ‘자유’를 유린하여 인간성 자체를 질식과 파멸에 몰아 넣는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무리 잔재주에 능하다 셈치더라도 이 생명적인 기반을 파멸하는 한 그들에게는 결코 성공이 없을 것입니다. 그 대신, 우리 자유진영에서는 여러가지 면에서 다소 서투른 점이 있다 할지라도 인간을 인간으로 대접할 기본의향을 살리고 인간의 기본자유를 존중하는 철학을 확집하는 한, 승리는 우리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전략적으로도 우리는 이 ‘자유’를 철저히 수호해야 할 처지에 있습니다.

자유의 반대는 노예일 것입니다. 노예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 하고 절규하는 것을 손벽치며 찬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이 ‘자유’의 문제를 논구할 때 다른 모든 문제를 논할 때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이를 규정하여야 바로 된다는 것을 우선 전제로 말씀할 밖에 없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면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요한8:31).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한 8:36).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등의 구절은 다 이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우리는 이것이 결코 생각없는 독단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1) 우선 크리스찬 인간학에 있어서 인간은 그 구성에 있어서는 이원적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적, 영적인 면으로는 자연질서를 초월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고 내재적, 생리적으로는 자연질서 안에서의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벨자이에프는 특히 이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 관계를 계산에 넣지 않고 인간을 보는 때에는 일원적으로 되며 따라서 심리적, 생리적, 화학적, 자연관계에서만 규정짓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결론에 도달합니까? 자연은 기계적(비인격적) 인과관계에서 운행됩니다. 그러므로 인간도 자연이라는 기계의 한 부분품으로 됩니다.

ⓐ 생리적으로 무슨 선이 어떻게 되면 심리가 어떻게 되고 뇌수의 어느 부분이 어떻게 되면 생각이 어떻게 된다는 것 등만으로 미루어 나갑니다. 그러면 결국 인간이란 것은 자연계에서의 심리적, 생리적, 파동과 반동에 따라 일어나는 ‘현상’이요 다른 아무 ‘독자적’인 결단을 할 수 있는 ‘인격’은 아니게 됩니다. 따라서 ‘자유’는 없는 것으로 됩니다. 현대결정론이 그것일 것입니다.

ⓑ 인간은 환경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합니다. 논리니 사상이니 하지만 그것은 다 사회의 생산과 분배 여하에 의하여 결정된다. 역사는 유물변증법적으로 전개되는 것뿐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물론 거기에도 ‘자유’는 없게 됩니다. 공산주의 사회에 실질적으로 ‘자유’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결론인가 합니다.

ⓒ 종교적인 결정론도 있습니다. 하느님이 모든 것을 대소만반사위를 다 예정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기계적으로 믿는데 인간에게는 ‘자유’가 없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종교기구나 교리를 절대화하여 각개인의 인격적, 신앙양심의 자유를 박탈하는 불상사도 있어 왔으며 지금 우리나라의 일부에서 감행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소극적인 면에서 논구된 것입니다.

(2)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자연에 영합함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상실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다른 면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자기를 ‘신화’함으로써 ‘자유’를 상실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것입니다.

자유와 독립은 일치한다. 자유의 가장 명백한 반대는 ‘의존’이다. 이런 상식적인 판단에 의하여 ‘자유한다는 것은 인간이 완전 독립한다는 것’을 의미함인데 그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독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식은 인간이 세상과 관계하는 데서는 통하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반대되는 것입니다. (Emil Brunner : Christianity and Civilization Vol. I. p. 132) 즉, 인간은 절대지존자가 아니므로 절대자유를 주장할 수 없으며 따라서 자기의 창조주를 떠나 절대자유를 감행한다면 그것은 제 손으로 제 터전을 ‘세상’에 빠트려 파괴하는 셈입니다. 마치 대해에 떠가는 배에 탄 사람이 ‘자유’한다고 배에서 뛰어나가면 물에 빠질 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물을 흠빽 마시고 배부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물에 영영 잠겨버리고 말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과 같이 자유한다고 금단의 열매를 먹은 때 그들에게는 사망이 왔습니다. 탕자가 아버지께로부터 자유한다고 분산해가지고 집을 떠난 때 동물(돼지)의 급에까지 전락했습니다. (누가 15:11-32)

무신론은 인간의 절대자유를 주장한 결론입니다. 니체나 맑스는 특히 이제 강력했습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정돈해 본다면

(1) 하느님이 없다. 그러므로 자유가 없다.

(2) 자유가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없다.

하는 두 가지 경향이라 하겠습니다.

첫째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없어야 자유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은 좀더 따져 봐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절대자유를 주창한다면 각개인이 각기 그 자신의 권위가 됩니다. 제가 제법이 됩니다. 종교가 무어냐, 도덕이 무어냐? 누가 내 하려는 것을 막을 것이냐? 하게 됩니다. 그러면 혼란이 옵니다. 특히 인간은 이기주의적인 것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므로 사회계약설이니 다수의 의사니 하는 것도 무난히 악용합니다. 그동안에도 이런 정신적인 문제에 무관심한 과학과 기술은 발달을 계속하여 무서운 파멸을 가져올 수 있는 놀라운 무기들을 만들어냅니다. 결국에는 정신박약자에게 원자탄 수소탄을 맡겨두는 셈입니다. 위험천만이라고 사람들은 거의 신경과민이 될 정도로 초조해 합니다. 자유주의 진영에서 공산주의 진영을 무서워하는 것도 이것이며 공산주의자 자신들이 인간을 무서워하고 의아심만 깊어지고 따라서 스파이 정책만 발달하고 통제와 독제가 극도로 강화되는 것도 이런데 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에게서 독립하여 절대자유한다는 인간의 종말은 자승자박의 노예로 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교에서는 자유에 대하여 어떤 멧세지를 제공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교 인간학의 문제임과 동시에 그것은 오직 하느님 관계에서만 획득되는 것임을 말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피조자라는 것입니다. 일방으로는 자연에 매어 있으면서 타방으로는 자연에 초월합니다. 그 초월한데가 ‘자유’가 깃들이는 ‘하느님의 형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을 떠난 때 ‘하느님의 형상’은 그 기능을 상실합니다. 그리하여 죄와 사망의 종이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구속은총에 순응하여 하느님 관계가 바로 잡혀지는 때 그는 하느님의 형상을 회복함과 동시에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가지게 됩니다. 그때 그는 하느님의 영의 내주와 함께 ‘자유’하는 ‘영의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위하시변 누가 능히 우리를 대적하리요 …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가 하느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 8:31-39) 하는 거리낌 없는 ‘자유인’의 심정과 기혼이 바울의 그것이었습니다. 절대주권이신 하느님이 사랑하신다면 누가 그를 속박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적 자유를 가진자만이 빈곤이나 시련이나 유혹이나 죽음의 모든 것을 이기고 오직 하느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계명을 지키며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건설적인 자유봉사를 즐겨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치적 전제에서, 경제적 빈곤에서 노동의 고역에서, 무지의 미망에서, 혼란한 무질서에서 자유함을 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안에서 하느님께 순종하는 때에만 옳게 성취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연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자연법칙을 가장 잘 알아, 가장 잘 순응하는 때에 가장 자연계 안에서 자유함을 얻는 것이 사실이라면 하느님 관계에 있어서도 하느님의 뜻에 가장 잘 순종함으로써만 가장 큰 자유를 받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선진자유국가의 내정을 살펴도 이 사실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젠하우어 대통령이 선거 때에 한 말 “종교적 신앙이 없이 자유국가를 생각할 수 없다”고 한 것은 단순한 선거방략으로 한 말이기에는 너무 깊은 의의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면 죄를 짓지 않을 것이며 죄가 감소되면 자유가 늘어갈 것이 사실인 까닭입니다.

하느님께 사로잡힌다는 것은 그의 사랑에 그만치 참예했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종’의 멍에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 받는 기쁨이요 감격입니다. 따라서 거기에는 억압대신에 자유로운 감격의 봉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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