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8일 화요일

[0401] 기독교의 기본문제 - 성도의 교제(로마 6:1-9) - 1955년

기독교의 기본문제


1955년

성도의 교제(로마 6:1-9)

크리스찬은 일명 ‘성도’라고 불려집니다. 그것은 밖으로 하나님이 ‘성별’해서 “이것은 내 백성이다” 하고 갈라 내셨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불려지는 것임과 동시에, 안으로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성결한 품격으로 지어져가고 있는 인간이라는 의미에서도 그렇게 불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름아래 있다는 것이 영광임과 동시에 얼마나 엄숙하고 두려운 사실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우선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거룩’이란 것은 하나님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어휘라고 합니다. 그것은 피조물에서 찾을 수 있는 속성이 아닙니다. 죄나 불완전이나 어두움 없는 절대타자이신 하나님, 죄 지은 인간이 감히 가까이 하면 저절로 죽을 밖에 없는 외경(Awe)의 하나님! 그이를 가리켜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라고 불렀습니다. 이사야가 (6장)성전에서 본 환상 “거룩 거룩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 그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도다” 한 그이가 곧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不淨(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라” 한 것이 ‘거룩한 이’ 앞에 선 이사야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이 거룩한 두려운 하나님의 백성이라 불려질 뿐아니라, 그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이젠하우어의 친구가 됐다라고 해도 굉장히 높은 사닥다리를 올라간 것 같아서 어깨가 넓어진다는데 이 우주의 창조주, 주재자 되시는 하나님 앞에 불리워 그의 ‘자녀’로 성별된 의미에서 그를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대 요새 하나님의 이름을 망녕되이 사용하며 그의 말씀을 항간의 잡담같이 경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음은 진실로 무사려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염위하신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죄인임을 상기하여 스스로를 단속해야 하겠습니다.

‘성도’가 되기까지……

① 그리스도와의 친교 (죽음)

그리스도의 하신 말씀에 “나를 따르려거던 자기를 이기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나를 위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모든 악하다 하는 거짓말로 너희를 비방하면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가 하늘에서 상받을 것이 크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버리는 자는 얻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버리는 자는 얻을 것이니라” 하신 것은 그리스도와의 친교가 성립되면 어떤 과정을 지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더 발전시킨 설명을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 알지 못하느냐!”(롬 6:2),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니 그러므로 지금은 내가 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어서 산다”(갈 2:20).

“우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냐?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고전 10:16),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감추었느니라”(골 3:3) 하는 등등이 쓰여 있습니다.

물론 바울은 그의 현실생활에 있어서 ‘도살장으로 끌려나가는 양과 같이’, ‘날마다 죽음을 맛보는’ 골고다의 길을 걸어 순교의 최종점까지 이른 사람이었습니다만 그의 그리스도와의 친교가 이상에 말한 바와 같이 정신적인 의미에서 벌써 철저한 자기부정의 포인트를 넘어선 거기서 성립되었다는 것이 더욱 눈에 뜨이는 점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다른 인사들과 친교를 맺는다는 것은 자기부정에서가 아니라, 도리어 자기표현에서 더 잘되어진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친교는 완전한 ‘자기부정’을 통과하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死’(사)를 지고 있는 우리 ‘옛사람’에 대하여 다시 철저한 사형을 집행한 것이라고 바울은 해명하였습니다(롬 6:6).

그런데 여기서 ‘죽음’이란 것은 보통 생각하는 ‘육체의 죽음’을 의미함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죽음입니다. 사람이 흔히 말하기를 “그까짓 것 죽으면 그만이지!”, “아이구 귀찮아 죽어버리고 말까부다!” 하고 자살을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천박한 유물론자의 생각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피조물이어서 하나님 앞에서 책임적인 존재자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육체가 죽는다고 그 사람이 아주 망각과 무에서 사라지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죽어서 아주 없어지고 마는 것이 확실하다면, 아주 기억에서 사라지고 책임도 없어지고 한다면, 나지 않았던 셈치고 일찍 죽어버리면 문제는 쉽게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몸은 죽어도 하나님 앞에서 피할 수 없는, 오히려 더 무서운 책임적 존재로 심판대 앞에 서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문제는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육신의 죽음이란 것은 참 ‘죽음’의 한 시사일는지는 모르나 그것이 죽음의 전부인 것은 아니며 따라서 그것으로 인생문제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제대로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이 잠깐 쓰고 있는 육신이 있고 없는 것이 그리 큰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궁극이신 ‘하나님’은 육체를 가지고 계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된 ‘인간’이라는 ‘주체’가 자기의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을 반역하고 있느냐, 그와 화목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인간의 근본문제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 ‘죽음’이란 것은 반역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정죄의 순간에 오는 영원한 ‘운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묵시록 21:8에 있는 ‘둘째 사망’이란 이것을 의미함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반역하고 도피할 곳을 찾아 헤메다가 그 암흑속에서도 하나님의 눈을 피할 길 없어 마침내 심판대 위에 오르는 것 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그 경륜에 순응하여 “내게로 오라” 부르시는 ‘지금’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는 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모습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토플래디의 노래 ‘萬世盤石’(만세반석)에서와 같이 ‘빈손들고 나아가, 十字架(십자가)를 붙잡고’, ‘저는 죽을 몸입니다. 살길 없습니다. 主(주)여 긍휼히 여기소서’ 하고 自己(자기)를 抛棄(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더 當然(당연)한 ‘歸依’(귀의)겠습니까? 그리하면 그 瞬間(순간)에 그리스도의 죽으신 十字架(십자가)가 곧 나의 죽음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十字架(십자가)와 함께 죽었다”, “나는 이제 더 살았다고 뽐낼 아무 근거도 없다. 그것은 ‘내’가 산다는 것은 그대로 ‘나의 죽음’ 을 凝視(응시)하는 機會(기회)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 그리스도의 죽음에 ‘나’를 合(합)하는 때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나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나의 生命(생명)이 그리스도의 生命(생명)에 감추어지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復活과 永生(영생)에 同參(동참)한다”는 것입니다.

요새 우리의 信仰界(신앙계)를 보면 우리의 그리스도교 신앙은 퍽이나 似而非(사이비)한 데로 흐르고 있음을 發見(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줘서 ‘내’가 ‘크리스찬’이 되어서, 크리스찬인 ‘내’가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남겨놓은 偉大(위대)한 事業(사업)을 계승한다고 ‘내’가 ‘高貴(고귀)한 決心(결심)’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壯談(장담)은 크면 클수록 落望(낙망)과 失敗(실패)가 또한 클 것을 預言(예언)할 수 있습니다. 왜? ‘내’가 否定(부정)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信仰(신앙)은 結局(결국)따져 보면 ‘그리스도 信仰’이 아니라 ‘自我信仰’(자아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結局(결국) ‘朽敗(후패)할 옛사람’인 ‘나’에게 ‘그리스도’라는 ‘탈’을 씌운데 不過(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朽敗(후패)할 것인 까닭입니다.

贖罪信仰(속죄신앙)은 ‘그리스도’만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나’는 다만 ‘그’의 十字架(십자가)만 붙잡으면 그 十字架(십자가)가 魔術的(마술적)인 能力(능력)이 있어서 ‘나’의 ‘護身符’(호신부)와 같이 되어 ‘나’를 安樂椅子(안락의자)에 앉은대로 天堂(천당)에 데려간다는 式(식)의 망녕된 信仰(신앙)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十字架(십자가)에서 그리스도 만이 죽으신 것이 아니라, ‘내’가 함께 죽은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슴(합)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十字架(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十字架(십자가)의 죽음에 나도 참예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受難(수난)의 親交(친교)’입니다. 이런 철저할 自己否定(자기부정)이 있은 다음에 그리스도와의 親交(친교)가 맺어지는 것이며 따라서 ‘聖徒’(성도)라 불려지는 것입니다.

② 그리스도와의 親交(친교) (생명)

그리스도의 十字架(십자가)에 同參(동참)한 瞬間(순간), 그는 놀라운 世界(세계)를 發見(발견)할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驚異(경이)한 것이어서 ‘새 하늘, 새 땅’이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 等(등)으로 表現(표현)해 봅니다. 이 새로운 驚異(경이)는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恩寵(은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十字架(십자가)에서 우리 自身(자신)의 죽음을 경험한 ‘할 수 없는 罪人(죄인)’들을 그 하나님 自身(자신)의 은총의 손에 받아 그리스도의 復活(부활)과 함께 그리스도의 生命(생명)안에 살리셔서 그 永遠(영원)하신 삶에 감추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合(합)하여 세례를 받으므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으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도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行(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한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 8:9-11에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靈(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罪(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다. 靈(영)은 義(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者(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안에 居(거)하시는 그의 靈(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靈(영)’, ‘그의 生命!’ 아까의 죽음의 課題(과제)는 이제 넘치는 生命(생명)의 世界(세계)로 躍進(약진)합니다. 復活(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죽을 몸, 죽은 靈魂(영혼)에 역사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같이 살게 하신다. 우리는 이제 다시 죽지 않는다. 우리의 生命(생명)이 죽을 運命(운명)의 ‘옛 사람’, ‘첫째 아담’의 안에 품겨있는 것이 아니라 ‘새 사람’, ‘둘째 아담’ ‘살리는 靈(영)’, 그리스도의 生命(생명)안에 감추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至尊(지존)하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기를 서슴치 않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라는 ‘옛사람’이 죽어서 그리스도의 恩寵(은총)안에서 다시 살아 그리스도와 사귀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사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永生(영생)입니다. 이것이 ‘聖徒’(성도)의 자랑입니다.

③ 聖徒(성도)가 된 後(후) : 聖徒(성도)끼리의 親交(친교)

以上(이상)의 過程(과정)을 지낸 ‘聖徒’(성도)는 이제부터 이 世上(세상)에서나 저 世上(세상)에서나 오로지 그리스도의 事業(사업)에 同參(동참)하는 것입니다. 聖徒(성도)의 交際(교제)는 서로 ‘끼리끼리’서의 좋아한다는 圓滑(원활)한 社交狀態(사교상태)를 의미함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全宇富的救贖事業(전우주적구속사업)에 同參(동참)한 同志的戰士(동지적 전사)로서의 親交(친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罪(죄)와 死亡(사망)의 종되었던 人類(인류)를 生命(생명)으로 옮겨서 새 사람을 만들어 새 人類(인류)를 創建(창건)하시는 贖良社會(속량사회)의 建設者(건설자)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를 이땅 위에 臨(임)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합하여,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四肢百體(사지백체)와 같이 되어 새 人類(인류), 새 歷史(역사)의 創造(창조)에 邁進(매진)하는 同志(동지)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世上(세상)에 사는 唯一(유일)한 目的(목적)은 곧 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義(의)’를 爲(위)한 戰鬪(전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너희 自身(자신)의 罪(죄)에 對(대)하여는 죽은 者(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對(대)하여는 산 者(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罪(죄)로 너희 죽을 몸에 王(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私慾(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肢體)를 義(의)의 兵器(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2).

이리하여 義(의)의 十字軍(십자군)이 된 聖徒(성도)는 한 肢體(지체)를 이루어 農村(농촌)에, 工場(공장)에, 學校(학교)에, 貧民村(빈민촌)에, 軍隊(군대)에, 家庭(가정)에, 議會(의회)에, 官廳(관청)에 가는 곳마다 거기에 새 歷史(역사)를 창조하며 새 希望(희망)을 提示(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그리스도와 함께 새 歷史(역사)를 만들어가는 무리의 活動(활동)을 가리켜 ‘聖徒(성도)의 交際(교제)’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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