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15일 화요일

[0538] 한국 교회 윤리생활의 재검토 (1962년 11월)

한국 교회 윤리생활의 재검토


(1962년 11월)

기독교 윤리는 크리스찬의 도덕생활을 규정하는 학문입니다. 여기에는 아래와 같은 세 출발점이 있습니다. 1) 기독교적 계시와 신앙, 2) 자아 분석, 3) 사회적 구조와 과정에 대한 이해. 그러므로 크리스찬의 도덕적 행위를 이해하기 위하여 적어도 신학적, 철학적, 인간학적, 사회학적 연구가 함께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석에 있어서는 구조, 기능, 관계, 과정, 의미 등이 포함됩니다. 당면하는 문제는 변합니다. 그러므로 그 문제에 관련되는 윤리적 반영도 변합니다.

특히 윤리의 분석이란 것은 과학이나 철학에서와 같이 물상이나 관념을 다루는 것이 아니고 신학이나 도덕적 이념에 의거한 인격경험을 합리적으로 다루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인격경험이란 윤리 도덕을 반영할 뿐 아니라, 인격 자체가 문화와 사회와 사상을 만드는 자율성도 갖고 있는 것이어서 사회를 제약하면서 동시에 사회에 제약받으며, 문화를 제약하면서 동시에 문화에 제약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객관적 분석은 더욱 어려워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윤리의 성질과 적당성을 찾는 방법으로 존 C. 베넷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독교 윤리는 기독교 신앙을 도덕생활에 적용하는 방향입니다. 크리스찬의 행위보다도 기독교 신앙에 초점을 둡니다. 다시 말해서, 우선 기독교 신앙에서의 본질적인 계명과 믿음과 교리가 어떤 것임을 정립하고 다음으로 그것을 신자생활의 특수한 형태 하나하나의 경우에 적용하려는 방향입니다.”

그러나 그 계시된 교훈과 인간들의 일상생활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것을 서로 맞추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과 일반 민중의 윤리생활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라 하겠습니다.

‘당위(Ought to be)’라는 지상명령이 명백하면 명백할수록 상대되는 인간 모순은 더욱 첨예화합니다. 인간은 그 앞에서 범과(犯過)의식, 좌절, 타락의 과정을 굴러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높은 윤리생활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우리가 우리 현실에서 가능한 최선을 다하는 것을 실천윤리로 삼습니다. 소위 중간공리(middle axiom)가 필요하게 됩니다. 500리 가려는 사람이 단번에 뛰어가지는 못하지만 이정표를 만들고 쉬엄쉬엄 하루에 몇십 리씩 가면 얼마 후에는 예정한 목표에 도달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도 ‘악’의 유혹은 따릅니다. 빨리 뛰든 천천히 걷든 목표에 도달한 것은 내 힘이다, 내 자랑이다 하는 생각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주의의 유혹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의 전통도 무던히 율법주의적이었습니다.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고 하여 ‘사사여사생(事死如事生, 세상 떠난 선조와 부모님도 살아계신 것같이 섬기라는 효도의 표현)’이라는 효의 원리에 서 있는 제사제도와 불교에서의 불상 등을 도매금으로 우상숭배라는 죄목 아래서 책벌, 출교한 사건들은 율법주의의 극을 달린 것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철야기도, 산기도, 단식기도 등의 규례에 따라 열심히 기도하는 중에 성령의 충만을 느낀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만, 거기서도 내가 너보다 월등하게 잘 믿어서 이런 경험을 갖게 되었으니 “모두 내게로 와서 성령를 받으라.”고 합니다. 자기가 성령 배급소장이나 된 것같이 무엄합니다. 가령 그가 성령을 받아서 도덕적으로도 근엄하다 하더라도 내가 기도했고 내가 성령의 권능을 받아서 내가 기적 같은 큰일을 했으니 내게로 오라고 한다면, 그 내가 주동적 인격이고 성령은 그의 도구로 됩니다. 결국 영광은 자기가 받을 것으로 하고 투자한 셈입니다. 역시 율법주의입니다.

한국 교회 50년 역사에서 최대의 실험, 일종의 자격시험 같은 사건은 일제 말기의 신사참배 강요였습니다. 이에 대한 반응은 다양했습니다. 극소수의 순교자(후에 출옥 성도로 자칭하던 분들), 소수의 수동적인 도피자, 대다수의 본의 아닌 순종자(전쟁 포로 기분), 극소수의 적극 협력자(불가피를 역이용한다는 전술)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장로교 총회로서의 공식 성명은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고 국가의식이니 교인들도 국민인 한 다 참가해야 한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충성을 이분(二分)하라는 말입니다.

해방 후에 총회로서의 회개 성명이 나왔었습니다만 아무도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율법주의의 무력성이 나타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5년 8월 15일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해방을 선포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전취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값없이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국제정치의 세력 균형과 일본 군벌에 대한 응징 등을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다고 합니다만, 우리는 그 배후에서 움직이는 하나님의 손가락을 봅니다.(단 5:24~28)

하나님은 우리에게 심판보다도 위로를 선포하셨습니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답게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사 40:1~2)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해방된 경위와 우리 민족이 일제의 합방에서 풀려난 것과는 그 과정과 성질과 상황이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위에 언급한 이사야 40장 1~2절의 해방에 대한 감격과 감사는 우리의 심정 그대로의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니만큼 8ㆍ15 해방에서 본심을 찾지 못한 한국인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친일파의 첨단을 걷던 사람들도, 신사참배라는 시험에 낙제했던 한국 교회 대다수의 교인, 교직자들도 통틀어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사참배 거부사건으로 투옥되었던 분들이 출옥하자 그들 자신의 신성성과 그 양심의 순결성을 과시하여 ‘출옥 성자’로 자칭하며, 정신적 특권이랄 수 있는 독선, 자고(自高), 자만을 선포했습니다. 신경과민적인 부정공포증에 걸려 스스로를 세상에서 절연시켰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불가항적 은혜가 우리 민족 전체에 임했다는 역사 이해에 위배되는 처사였습니다. 자기 노력에 의한 계명 준수라는 율법주의적 공적(功績) 사상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그 열매가 스스로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형제를 마귀라 하고, 현존 교회를 마귀당이라 하고, 주일날 급한 일이 있어 택시를 탔다 해서 징계처분을 받고 그 처분을 면하기 위해서 택시값은 다음날에 지불했기 때문에 무죄하다고 변론하는 등의 현상을 빚어낸 사례들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을 능가하는 바리새주의라고 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왜 잘못이냐.” 하고 바리새인들에게 항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를 가장 잘 믿는 신자로 자처하면서 예수의 자유하는 복음은 거부하고 바리새인의 율법주의를 따라갔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율법으로 환원시키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상대로 바울은 목숨 걸고 싸웠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 사건의 깊은 데를 더듬어보고 넘어가기로 합시다. 내가 계명을 지킨다는 근거 위에 기독교 윤리를 수립한다는 I–It의 관계를 출발점으로 한다면 율법주의, 도덕주의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틴 루터가 말했다는 “선한 일을 해서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이 되어서 선한 일을 한다.”고 한 명언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 루터의 말이 기독교 윤리의 출발점이면서 종착점이 되는 것입니다. 윤리생활이 어떤 객관적 덕목(도덕목록) 또는 추상적 개념을 인격 이상에 두고 인격을 그에 종속시키려는 방향을 취하는 한, 바리새적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복음적인 윤리란 어떤 것입니까? 내가 내 마음의 문을 닫고 나 자신의 울타리 안에 안주하여 스스로 주인이 된다는 폐쇄주의가 아니라, 마음 문을 열어 하나님의 영을 영접하는 행위입니다. 그리하면 성령이 내 맘에 들어와 나를 감화하시고 나를 다시 창조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신다는 방향입니다.

그리스도를 향하여 마음문을 연다는 것이 믿음입니다. 미리 율법적이 될 필요도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 던지는 것입니다. 청소 작업과 재창조 공사는 그리스도께서 맡아하십니다. 그래서 나를 그리스도의 생명에 접붙여 주십니다. 그때에는 나에게도 사랑과 화평과 희락과 자비와 양선과 인내와 충성과 온유와 절제 등의 선한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이 윤리는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너’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이란 절대 주체와 나라는 주어진 주체가 사랑과 믿음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대로 한다면 “내가 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어서 내가 그의 나로 산다.”는 체험입니다. 그때의 윤리적 열매는 하나님 은혜의 결실이요, 나 자신의 행위의 열매가 아닙니다. 내가 행한다 하더라도 온전히 은혜의 감격에서 행하는 것이어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권면 하신다’는 실감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영광은 그리스도의 것이요, 내 것이 아닙니다. 나는 형제를 정죄하는 심판자가 아닙니다. 심판은 그리스도께서 하십니다. 나는 다만 내 신앙을 고백하고 내 양심에 촉발하는 성령의 증거를 말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의 자유인’으로 새 존재가 된, 또는 되어가고 있는 인간은 고정적ㆍ추상적ㆍ계율적인 조항에 노예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것이 신학이나 규정된 도덕률이나 교훈이나 자연법이나 소위 지상명령이나 간에 거기에 예속되지는 않습니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 하느니라.”(고전 2:15)

그러면 영의 자유인은 아무렇게나 해도 좋다는 말입니까? 초대교회의 소위 ‘무법주의’를 시인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바울의 말과 같이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말씀에 비추어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은 간단하여 현대의 복잡다단한 일상생활에서 날마다 야기되는 문제들에 맞추어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고, 특히 사회구조에서 오는 실업자 문제, 전쟁 문제, 경제 문제, 노동법 문제 등에 육법전서 조문처럼 적용할 수 는 없게 되어 있습니다. 판단이 혼미해질 때 신비적인 암시를 기다릴 수도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은 극히 예외적인 것입니다. 오히려 오도되기 쉽 습니다.

여기서 내가 맨 처음에 말한 사상이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사상은 윤리를 명령법에서 서술법에로 옮기고 거기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윤리에서는 어떤 사건을 판단할 때에 우선 하나님(역사의 주인)과 이웃(사회)과 그리고 사건 당국자인 개인과의 인간적 관련됨에서 출발합니다. 소위 정황(情況) 분석을 정직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그 도덕적 행위에 원칙을 제공하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것은 하나님과 나, 나와 이웃의 상호관계됨에서 보고 그 관계됨에서 진행시키는 것입니다. 정치적ㆍ사회적ㆍ경제적 사회과학의 데이터에서 그것들의 내적 역사적 의미, 즉 니버가 말하는 internal history의 의미를 포착하고 거기서 윤리적 결단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강연 서두에 서 말한 1) 기독교적 계시와 신앙, 2) 자아 분석, 3) 사회적 구조와 과정에 대한 이해를 기독교 윤리 결단의 3요소로 지적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 방향은 사회를 위한 어떤 추상적·원칙적 가치를 내세우고, 그것이 적용된 경우에 산출될 어떤 이상적 사회 형태를 상정한 다음에, 현존 사회상을 이에 맞도록 끌어올리기 위하여 노력한다는 방향에 비하면 훨씬 더 자기모순을 제거할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상주의에 있어서는 목적과 방법이 서로 맞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타협과 소위 중간공리(middle axiom)라는 구차스러운 ‘군일’을 하게 되었습니다만, 후자는 애당초부터 인격적 자유에서 출발하여 ‘영’의 재량 아래서 상호관계됨을 참작하여 작정한 기독교 도덕 행위였기 때문에 융통성 있는 자유 결단과 자유 실천으로 시종하는 것입니다. 영의 자유가 자유하는 생명의 선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윤리 결단은 고정적일 수가 없습니다. 사회가 변하고 문제가 변하는 데 따라 그에 대한 크리스찬의 윤리적 이해와 결단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다만 자유하는 성령의 자유로운 사랑의 생명만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든 세대를 통하여 변하는 정황에서 변치 않는 원형을 따라 현존 윤리를 재평가, 재조정, 재창조하는 근원이 되며 추진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원칙 아래서 한국 교회 윤리생활의 구체적 양상의 몇 가지를 재검토하기로 합시다.

[1] 교권과 윤리

한국의 다른 교파에 대하여는 언급할 자격도 없고 그럴 처지도 아닙니다만, 적어도 가장 민주적인 구조를 가졌다는 장로교회에서는 그동안에 아주 극심한 교권주의로 전락했다는 것이 노출되었습니다. 교권이란 것은 과거에 의존하려는 것을 특징으로 합니다. 과거의 전승에서 그들의 권위를 보장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수적이며 따라서 새로운 것을 싫어하고 또 무서워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 그들의 권위를 전복 또는 훼손시킬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 제사장들은 교권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유롭고 새로운 하나님의 대언자인 예언자들을 싫어하고 박해했습니다. 예수 당시의 예수의 제자들은 예언자의 계열에 가산되어 있었습니다. 산상교훈에서 예수님은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하고 제자들의 계열이 예언자 전승이었다는 것을 암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교권자였던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등은 예수가 그들의 권위에 거슬리는 새로운 말씀을 선포한다는 것이 싫어서 무슨 이유를 붙여서라도 예수를 제거하려 했습니다. 스파이, 모략, 유도전술 등으로 올무에 걸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지혜는 그들의 그것보다 월등하게 높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모든 흉계는 실패했습니다.

이제는 폭력을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12사도 중에서 돈에 민감한 가룟 유다를 매수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체포하여 엉터리 재판으로 사형을 언도하고,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국가반란죄’로 고소하여 십자가에 달아 사형을 집행했습니다. 그 원흉은 제사장과 바리새인 등 교권주의자였습니다.

예수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속죄 사랑으로 죽음을 이기는 것이 하나님의 더 높은 경륜인 줄을 확신하고 순종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였습니다. 다만 볼 줄 아는 눈만이 볼 수 있는 계시였습니다. 교권자들은 자기 교만과 기득권 수호 때문에 자기들 교권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심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들을 살해하는 최대의 역적이 되었습니다.

원래 교권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말씀에 봉사하는 의무요, 하나님을 대신하는 통치자나 심판자는 아닌 것입니다. 교권은 사무적인 기관입니다. 진리를 규정하거나 옹호하거나 심판하는 기관이 아닙니다. 진리에 대한 아무 전문적인 지식도 준비돼 있지 않은 ‘손’의 수에 의하여 진리가 좌우된다면 그것 자체가 반윤리적이기 때문에 동시에 반진리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권은 기관화한 객체요, 영의 비의를 직접으로 경험하는 산 인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 교권주의적 인간 교만에서 철저히 돌이켜 재를 무릅쓰고 겸손하게 되지 않는 한, 분열과 패역은 계속될 것입니다. 교권주의는 전통과 법과 규칙과 고정된 교리에 의존하는 한, 율법주의의 올무를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율법’은 의(義)를 근거로 한 것이지만, ‘율법주의’는 그 의를 정죄와 죽음의 이기로 사용합니다. 율법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2] 정의와 사랑의 대화

한국 교회에서 어떤 구체적인 문제를 다룰 때 그 논거의 밑바닥을 따져보면 결국 정의파와 사랑파로 나누어집니다. 불의를 규탄하면 사랑으로 덮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사랑으로 용서하자면 무법주의 부패 조장이라고 불평합니다.

그리스도에게서 완전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는 죄 없는 분이면서 모든 죄인들의 죄를 스스로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죄인의 죄를 용서하는 법적 대가로 지불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은 죄인은 죄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속죄제물을 받으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의인의 칭호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무법주의가 아닙니다. 이 속량받은 죄인들은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께 무시로 대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셨는데 누가 능히 우리를 정죄하리오?” 하고 바울은 외쳤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의는 이 사랑 안에서의 의입니다. 사랑은 대가없이 주려는 의욕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 대가를 치름으로 ‘무법주의’를 입다물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신자는 사랑에서 단절된 의를 주장합니다.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는다.”는 균형적 보복 원리를 의로 정하고 그 이상의 의를 추구하려 하지는 않습니다.

한 걸음 나아가서 사랑을 주장할 경우에도 정실관계가 앞섭니다. 온정주의, 센티멘털리즘에 사로잡힙니다. ‘내가 누구에게 사랑을 베풀었는데 그가 나에게 아는 체하지 않습니다. 그런 놈하고는 사귈 생각이 없다’ 합니다. 분열이 생깁니다. 흔해빠진 것이 그런 인물들이니 분열에 분열을 거듭합니다.

정의와 사랑은 일체양면(一體兩面)입니다. 사랑 없는 곳에 정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지 않은 그 자체가 불의이기 때문입니다. 정의 없는 곳에 사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균형적 보복은 율법주의요, 자유하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사랑 안에서 말하는 사람, 솔직하게 잘못의 책임을 지면서 용서를 청하는 사람, 그리고 이 의로운 사랑의 감격에서 새로운 삶을 전개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크리스찬의 본모습입니다.

한국 교회는 친교를 재건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을 위하여 피차 대화의 기회를 만들고 솔직한 자기비판과 정상 분석을 거쳐서 제3의 화합 지점에 도달해야 하겠습니다.

[3] 대화해야 할 당면 과제들

1) 제사 문제

한국에 기독교가 전래된 이래, 가장 많이 윤리적으로 공격받고 양심에 반발을 느끼게 한 것은 부모와 근조(近祖)에게 드리는 제사행위를 우상숭배라는 견지에서 폐기시킨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반발에는 일리가 있는 것이어서 지금쯤 재고되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제사란 어느 민족에게나 있는 것이어서 그것이 종교 또는 반종교 행사였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중국에서는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한다는 제천(祭天)의 장중한 행사가 있어 왔습니다. 그리고 일반 국민은 조상의 영전에 제사했습니다.

공자께서 ‘사귀신(事鬼神)’, 즉 귀신을 섬긴다는 것은 ‘봉제사(奉祭祀)’, 즉 제사를 지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귀(鬼)는 귀야(歸也)’라고 주해했습니다. 귀신(鬼神)이란 말은 신에게로 돌아간 분이라는 뜻이겠습니다.

공자는 이에 대하여 깊이 따지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계로 문사귀신, 자왈 미능사인 언능사귀(季路 問事鬼神, 子曰 未能事人 焉能事鬼)”리요 했습니다. 제자 계로가 귀신 섬기는 도를 물으니 공자께서 대답하시기를 “사람 섬기는 일도 채 못하는데 어떻게 귀신 섬기는 일까지 할 수 있겠는가?” 하셨다는 말입니다. “왈 문사 왈 미지생 언지사(曰 問死 曰 未知生 焉知死)”리요 했답니다. 죽음에 대하여 물으니 공자 말씀이 “삶도 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미(未)’는 아주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채 알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공자님은 사후 영혼의 문제를 현실을 보는 것같이 파악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슨 유괴(幽怪)한 호기심을 들쑤셔서 사람을 미혹시키는 일은 원치 않으셨습니다.

공자님은 사자(死者)를 생자(生者)의 연장으로 생각하여 “사사여사생, 사망여사존 효지지야(事死如事生, 事亡如事存 孝之至也)”라 하셨습니다. “세상 떠나신 분 섬기기를 살아 계신 분 섬기듯 하고, 없으신 분 섬기기를 생존하신 분 섬기듯 하라. 그것이 효도의 지극한 것이니라.” 하는 뜻입니다. “생사지 이예, 제지 이예 민무유감(生事之 以禮, 祭之 以禮 民無遺憾)”이라고도 했습니다. “생존해 계실 때 예절 다해 섬기고, 세상 떠나실 때 예절 다해 장사지내고, 제사를 예절대로 하게 되면 백성에게 유감이 없을 것이다.”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위의 구절들을 살펴본다면 공자께서 조상에게 제사드린 것은 미신적인 종교행사라기보다도 돌아가신 육친들을 추모하는 식전(式典)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음식상을 차린다, 그 앞에 분향하고 고축(告祝)하고 절하고 하는 것은 ‘사사여사생(事死如事生)’의 효도인 것뿐입니다. 무슨 접신술이나 우상에게 복 비는 순 종교행사와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윤리적 심정의 예술적 표현이겠습니다.

그렇다면 우선 그들의 양심에 맡기고 서서히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덮어놓고 ‘우상숭배’라고 그들 눈앞에서 교회 문을 닫는 것을 인정의 떳떳함이라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민족종교로서의 무교(巫敎), 즉 샤머니즘은 천년만년 우리 민족 심층에 갈피갈피 깔려있는 원시종교입니다. 유교에서도 그 제사제도에 이 무교적 요소를 다분히 채택한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초대 선교사들이 청교도적인 율법주의에 젖어 십계명의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고 한 계율만을 강요하고 복음의 자유를 동결시킨 것은 과오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동양 재래종교에 무슨 좋은 것이 있겠느냐? 있으면 우상숭배뿐이다.” 하는 선입견 때문에 “불상도 우상이요, 위패도 우상이요, 수도승에게 공양미 한 줌 떠주는 것도 우상숭배요, 조상 제사도 우상숭배다. 그대들이 예수 믿으려거든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 하는 태도를 취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예수는 믿고 싶으나 조상 제사를 폐기하는 불효자는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사대부층의 고민이었습니다. 초대 선교사들은 제사 문제와 인간 구원과를 엇바꾼 셈입니다.

좀 더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모든 양식의 피조물 숭배는 예외 없이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바울은 “돈을 탐하는 것이 곧 우상숭배니라.” 하고 두번 세번 경고했습니다. 돈을 탐하는 교인이 교회에서 책벌이나 출교당한 일이 몇 건이나 됩니까? “각다귀는 걸러 먹고 약대는 통째로 삼킨다.”는 사례는 제사 문제에서도 여실하게 나타납니다.

제사 행사를 기독교적 철학을 배경으로 한 추모의 예식으로 대체시켜야 하겠습니다. 돌아가신 분의 초상이나 사진을 가정 제단에 세우고, 그 앞에서 하나님께 간단한 예배를 드리고 추억담을 피력한 후에 성전 제물 나누듯 소찬이라도 서로 나누며 친교를 새롭게 하는 것이 좋은 대안(代案)일 것 같습니다. 초대 선교사들이 이런 방식으로 제전 양식을 기독교화하였더라면 양자택일이 아닌 건설적인 제사의 기독교화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2) 주초(酒草) 문제

술 마시고 담배 먹는 문제는 그 본질에 있어서 직접 종교 문제가 될 수도 없고 윤리 문제가 될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기호, 취미의 문제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로 등장한 것은 ‘술’이란 보통 성질의 음료가 아니고 일종의 마약적인 성질의 것이어서 마시는 자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인격적 책임을 지울 수 없을 정도로 자아를 상실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술버릇 나쁜 사람은 파렴치, 폭행, 가정 파괴 등의 행동을 다반사로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은 대부분의 인간을 매혹합니다. 그것은 술이 맛있어서라기보다도 인간이 정신적 공허와 고민과 무료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어서 그러는 것입니다.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술은 일종의 종교적 역할을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음주와 기독교 신앙생활과는 그 본질에 있어서 아주 인연이 먼 것 같으면서 그 기능에 있어서는 아주 가까운 대결자로 맞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음주를 장려한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동시에 음주에 무관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순서가 있습니다. “술을 끊어야 예수를 믿을 수 있다.”는 순서가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술도 끊고 다른 선한 길을 걸을 수도 있다.”는 순서로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술의 마약적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예수를 믿는 데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나는 위에서 술 문제는 종교 문제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금주는 생활 훈련의 문제입니다. 직접 구원을 좌우하는 종교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각자의 양심과 교양과 윤리적 습성의 차이에 따라 재량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제력의 강약, 사교생활의 필요 등을 고려하여 그 가부를 판단할 것이요, 일률적으로 계명화할 것은 아닙니다.

한국 교회가 원칙적으로 이를 금지했다는 것은 한국인의 자제력을 고려해 넣은 결단이었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 실천에 있어서는 운영의 묘(妙)를 요한다고 보겠습니다. 술에 마약성이 있다는 것은 술에 중독성이 있다는 말과 통합니다. 한국 속담에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먹고, 다음에는 술이 술을 먹고,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먹는다.”고 한 것은 사실인 경우가 많습니다.

알코올 중독자는 고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내버려둔다는 것은 인간 구원의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소위 알코올중독방지협회(Alcoholics Anonymous)라는 단체가 생겨서 많은 중독자를 술의 늪에서 건져내고 있습니다.

3) 성(性) 문제

성 관계를 다만 생리적, 본능적인 것으로만 다루려는 것은 동물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인간도 동물이니까 동물적인 취급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동물 이상인 ‘하나님 형상’으로 지어진 피조물입니다.

성문제에 있어서도 인간적인 정신성, 도덕성, 영성의 견지에서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남과 여의 윤리적, 정신적인 사랑이 성의 본능을 자유로 제약하는 것이 인간의 긍지인 것입니다. 인격적 이해가 둘을 한 몸으로 결합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양성의 결합은 깊은 인격적 상호 이해의 표현입니다. 이 결합을 가능케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결혼 예절은 이 양성 결합을 윤리화하고 가정화하고 사회화하는 사랑의 성찬식입니다. 이 일남일녀의 인격적 결합이 항구하고 불변한다는 것을 하나님과 공중 앞에서 서약하는 예전입니다. 엄숙한 종교 행사입니다. 그러므로 성의 해방을 간판으로 성행위를 마치 음식점에서 식사하듯 하는 것은 인간성 자체를 동물로 저하시키고 스스로를 짐승의 반열에 가산하는 인간 모독이라 하겠습니다. 교회는 성의 존엄과 순결을 보호해야 할 것입니다.

4) 타종교에 대한 태도

종래의 한국 교회에서 타종교는 모두가 마귀의 작품이라고 일축하고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는 것같이 생각한 것은 무지에서 생겨난 옹고집이라 하겠습니다. 완전하지는 못하더라도 모든 종교는 인간의 진리 탐구, 영원에의 동경, 죄와 번뇌에서의 구출 등을 위한 진지한 순례의 기록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종교가 동등이고 결국에는 한 고장으로 간다는 무책임한 논조에 찬성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종교들에 대해 존경과 이해와 사랑으로 대화의 길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각 종교가 완전 독립된 권리만을 주장하고 각기 자기들의 폐쇄사회에 농성한다면 자체 안에 질식 상태가 생길 것입니다. 인간이 전체로서의 책임을 분담하고 있는 한, 폐쇄사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사회생활이나 종교생활이나 그 단체의 구심점이 있어야 하고 최고 권위자가 설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불교에는 석가모니가 있고, 유교에는 공자가 있고, 기독교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있고, 이슬람교에는 마호메트가 있습니다. 모두가 자기들 교조만이 최고라고 그를 절대화합니다. 그분들을 격하시킬 재간은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비교급의 입장에서 대화할 수 있겠느냐 합니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모든 종교에 공통되는 공분모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공자의 인(仁)도 사랑이요, 불교의 자비도 사랑입니다. 기독교는 물론 사랑의 종교입니다. 마호메트교는 겉으로 보면 전쟁신 같기도 할 것입니다만 그 본심은 역시 사랑입니다. 사랑을 표시하는 방식이 다른 것뿐입니다.

요컨대 각기 교리를 절대화한다면 통일보다도 분열을 격화할 것입니다. 교리의 차이와 제도의 차이를 넘어서 합할 수 있는 길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증진을 중심적으로 추진해야 합니다.

5) 역사에 대한 태도

한국 교회는 종래에 ‘나와 하나님’ 관계를 강조하고 하나님을 믿는 내가 교회를 섬긴다는 데까지는 충실하게 추진시켰습니다. 그러나 대사회관계에서는 아주 대립적인 의식을 품고 있었습니다. 망할 세상에 집착하지 말고 속히 탈출하여 교회에 들어와 영생 포구를 향하여 옮겨갈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세상에서 끌어내어 교회인이 되게 하는 전도사업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세상 문제 자체에 직접 책임을 느끼고 이에 참여한다는 생각은 거의 없었습니다. 혹 민족운동, 사회운동, 독립운동 등에 가담하는 교인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교인임에도 불구하고……’였고 ‘교인이기 때문에……’는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제자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우리가 단일성(unity)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너’ 없이 ‘내’가 없고, ‘너와 나’ 없이 ‘우리’가 없고, ‘하나님’ 없이 ‘너도 나도 우리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구심점 또는 정점으로 하고 너와 나와 우리가 연합하여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란 구심점이 없으면 역사는 바벨탑같이 혼란, 분산, 붕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역사의 주인’이라고 부릅니다. 외적인 역사를 말할 때에는 우리가 ‘시간 안에 있는 우리’로 될 것입니다만, 내적인 역사를 말할 때에는 ‘시간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안에는 우주와 역사가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와 대립한다는 의식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역사가 ‘내 것’이라는 의미에서 역사 갱신과 재건과 인간화에 정진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할 때 빛과 암흑을 대립시키는 의식만을 부각시킬 것이 아니라, 그 어두운 세상이 사실인즉 내 어두움이라는 것을 의식해야 합니다. 빛이 밝으면 어두움은 저절로 물러가는 것입니다. 어두움은 빛의 책임입니다.

그러면 역사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입니까? 탈출이나 도피가 아니라 참여해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참여하라는 것입니까? 우리는 우선 현대 사회 자체의 구조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연구 파악하고 그 현상을 사회학적으로 또 철학적, 신학적으로 분석하여 그 구체적인 문제들을 발굴하고 그 하나하나에 구체적인 봉사를 추진해야 하겠습니다. 센티멘털리즘이나 유토피아니즘은 공허합니다.

나는 오늘 저녁에 한국 교회에 대하여 귀에 거슬리는 많은 고발을 했습니다. 그 고발당한 자 중에는 나 자신도 들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여러분의 용서를 바라는 바입니다. 나는 어제 저녁에 어떤 외국에서 온 유명하다는 목사님의 설교를 통역할 책임을 졌기 때문에 여기 와서 서남동 목사님의 설교를 듣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전해 주는 강연 내용을 대강 들을 수 있었는데 아주 감명 깊었습니다.

서남동 목사님은 시편 51편의 말씀을 본문으로 하고 ‘깨어진 마음’이란 설교를 하였답니다. 하나님께서는 깨어진 심정, 깨어진 생활, 깨어진 땅, 깨어진 한국, 깨어져 파편된 한국 교회의 깨어진 조각 하나하나를 주워 모아 요리조리 제자리를 찾아 붙여 아름다운 화병의 원형을 회복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깨어진 파편이라고 마구 쓸어 버리질 않으십니다.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리며 단념하지 않으시는 아버지십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바른 방향으로 마음을 돌이키는 그것입니다. 어떤 단편적인 범과를 하나 둘 생각나는 대로 뉘우쳐 고치는 것만이 아닙니다. 통성기도니 회개의 통곡이니 하는 것은 감정의 발산 작용일지는 몰라도 영속성이 의심스럽습니다. 감정이 식으면 도루묵이 됩니다. 한 인상적인 기억일 수는 있겠지요.

회개는 전인격적인 방향 전환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기 교만을 근본적으로 청산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건과 의미를 하나님의 정의로운 사랑 안에서 재평가하는 마음의 혁명입니다. 내적 역사의 신세기를 고지(告知)하는 외침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드린 이 말씀은 초고(草稿)여서 tentative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서로 겸손하게 솔직하게 대화를 통하여 우리 한국 교회의 윤리생활 재평가에 어떤 기준을 제공하는 것이 된다면 그것으로 내 목적은 달성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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