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3일 목요일

[0903] 말씀을 새긴다 (1) : 시작하는 말 - 예수의 이미지

말씀을 새긴다 (1)
-시작하는 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마태 4:4).

이것은 예수의 인간혁명 운동 첫시작에서 맞부딪힌 危機(위기)에 돌파구를 뚫은 폭탄이다. 인간이 動物圈(동물권, Zoo-Sphere) 에서 정신권(Noo-Sphere)에로 生長(생장)하는 實際(실제)에서 먹고 자라는 문제, 무얼 먹고 사는가, 자라는가, 성숙하는가-를 지적한 것이다.

사람이 동물권에만 속해 있다면 음식먹는 것만으로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인간’인 이상 정신을 위한 양식을 먹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은 人間(인간)됨에 있어서 ‘밥’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용할 양식’인 것이다.그러므로 ‘떡으로만’이란 말은 ‘떡만 먹고……’란 말로 새길 수 있다. 따라서 ‘말씀으로’란 말도 ‘말씀을 먹어야’ 산다는 표현이 된다. 여기서 ‘산다’는 말은 死後(사후)의 永生(영생)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다. 결국에는 그것도 포함될 것이겠지만 지금 여기서는 ‘밥먹고 사는’인간을 상대로 하고 밥만이 아니라 ‘말씀’을 먹어야 산다는 뜻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현 時點(시점)에서의 人間(인간)이 산다는 데 필요 불가결한 식량은 밥과 말씀이란 말이다.

‘먹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밥이 있어도 그것을 먹는 인간만이 사는 것이다. 먹는다는 것은 그것을 씹어 위장에서 소화시켜 자기의 피와 살이 되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먹어도 소화시키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말씀’도 그렇다. 먹어야 한다. 그 말씀을 내 마음에 넣어 음미하고 그것을 소화하여 내 생각, 내 감정, 내 생활, 내 행동으로 되게 해야 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말’로 되어 내 몸, 내 삶으로 고백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나는 말씀의 人間化(인간화)라고 말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한” - 그이가 예수였다(요한 1:14). “그는 人間化(인간화)한 말씀 그것이었다.” 우리는 무지개 쳐다 보듯이 멀리서 그의 영광을 창탄하며 경배하는 것만으로 족한 것이 아니다. 베드로처럼 멀찌감치 뒤떨어져 마지 못해 따르는 못난이 노릇을 되풀이해서도 안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플래카드 표어에 쓰이는 ‘宣傳用(선전용) 人間(인간)’일 수도 없다.

그는 우리에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이다. 너희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 그리하면 그는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요한 6:48-56) 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산다”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이가 예수다.

그러므로 말씀을 먹는다는 말은 예수를 먹는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예수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않는 사람은 그 속에 생명이 없다(요한 6:53) 고 했다. 이 말을 듣는 유대인들이 질겁을 했을 것은 짐작이 간다. 저 사람이 우리를 식인종으로 아나부다!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할 수 있겠느냐?”(요한 6:25) 하고 수군거렸다. 제자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이 떠나갔다(요한 6:66). 귀에 거슬린다. 그러나 그것은 진질이다. 예수의 살과 피가 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살과 피가 되게 하기 위하여는 그것을 우리 各自(각자)가 씹어먹고 소화시키는 길 밖에 없다. 그러므로 제자들과 이별하는 마감 식탁에서 예수는 “이것은 내 살이다”, “이것은 내 피다”, “이것을 먹고 이것을 마셔라”하는 성만찬의 상징적 예전을 설정해 주신 것이다.

“성경을 새긴다” - ‘새긴다’는 말은 설명한다는 뜻도 있고, 도장을 새기듯이 무언가를 형상화한다는 뜻도 있고 소나 양이 식물을 反影(반영)하듯이 되돌려 씹는다는 뜻도 있다. 요컨대 말씀이 내게 生理化(생리화), 인간화 또는 품격화하게 하기 위한 공작인 것이다.

예수라는 개인이 인간화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과 같이 우리도 個別的(개별적)으로 말씀을 먹고 소화하여 그 생명으로 사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個人(개인)이 ‘산다’는 것은 人類(인류) 全體(전체)와의 歷史的(역사적)관계에서만 可能(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위로 하나님 관계, 옆으로 모든 인간들과의 관계를 떠나서 ‘나’라는 개체가 살아갈 수는 없다고 본다. 지금의 世俗社會(세속사회)에서는 豐饒(풍요)한 물질 조건만 있으면 그만이란 生活方向(생활방향)을 추구하는 것이 사실이다. 빵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인간인 이상, 그것만으로 살 수는 없다. 정신적인 욕구 - 그것은 철학, 도덕,, 종교 등등 복잡 다양한 世界(세계)를 탐색한다. 말씀의 세계는 무한대의 거처다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歷史(역사)라는 현실 무대에서 事件化(사건화)한다. 그 연출자는 인간들이다. 選手(선수)는 小數(소수)일지 모르나 不參者(불참자), 방관자는 있을 수 없다. 모든 인간이 각기 자기들의 응원단에 끼어 들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고 한다. 크리스찬은 ‘왕노릇’한다는 약속을 받고 있다. ‘왕노릇’한다는 말은 그만큼 그가 歷史(역사)에서의 위치가 중대하고 그 지도자적인 임무가 크고 그 책임이 무겁다는 것을 암시한다. 歷史(역사)를 떠난 王(왕)이 어디 있겠는가? ‘메시야’는 理想的(이상적) 王者(왕자)로 待望(대망)되어 왔던 것이다. 크리스챤은 그 아래서 각기 역사에 책임을 담당한 자들이다. 먹고 피를 마신 인간들로서 그의 역사에 무관심, 무능, 불참, 도피 등등을 예사롭게 여길 수가 없을 것이 아닌가? 그것은 무책임한 직무 유기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땅 위에 임한다는 것이 예수의 선언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에 사랑과 충성으로 순종하는 인간들 속에 임하는 정신적 왕국이다. 그것이 ‘나라’니 만큼 사회화를 전제로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나라’는 세속 역사를 소재로 한다 ‘서말 가루 반죽에 섞은 적은 누룩’과 같이 그 가루 반죽을 변화시킨다.

우리는 이런 方向一個人(방향일개인), 社會(사회), 하나님의 三角型的(삼각형적) 관계성에서 말씀을 새겨가려 한다. 우선 예수의 삶부터 더듬어 보기로 한다.

예수의 「이미지」

① 족보

- 마태 1:1-17, 누가 3:23-38 -

血族社會(혈족사회), 부족사회, 신분사회 등등에서는 족보가 무척 필요했었다. 우리나라 李朝末(이조말)까지도 족보를 캐는 것이 인간접촉의 첫 과제였다. 그러나 개화운동 이후 오늘에 와서는 족보 같은 것을 꼬치꼬치 따지는 사람은 없다. 현존한 그 사람만을 상대로 사귄다. 그러니까 예수에게 있어서도 예수 자신의 ‘사람됨’ 그것이 문제요, 그의 족보 같은 데는 아무런 흥미도 없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 족보가 쓰여져 있다는 데는 버리지 못할 이유가 있다. 그것은 문화에 있어서 과거의 전승이 얼마나 근본적인 것임을 가르쳐 준다. 아브라함의 신앙, 다윗의 왕자적 風貌(풍모) - 그밖에 줄기차게 이어온 민족의 정신적 正氣(정기)를 이어받아서 비로소 오늘의 大成(대성)을 기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요새 소위 西歐(서구) 富饒(부요)사회에서는 젊은이들이 世代差(세대차)라는 깃발 아래서 같은 世代(세대)끼리만 어울리고 一切(일절)의 ‘旣成世代(기성세대)’와는 斷絶(단절)한다는 기풍을 일으키고 있다. 나면서부터 죽는 날까지 ‘성장’하는 인간인 경우 고정된 ‘旣成’(기성)이란 있을 수 없겠지만 어쨌든 세대 간의 단절이란 사실은 과거로부터의 전승을 거부하는 것이어서 인간성의 혼란과 빈곤의 퇴락을 가져올 우려가 농후하다. 어른들이 다만 더 많은 年輪(연륜)의 후광을 빙자하여 전진하는 젊은 세대의 뒷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는 일을 한다면 그것은 결코 허용될 수 없다. 그러나 유구(悠久)한 과거로부터 내리꽂히는 시간성과 이 세대의 새로 형성되는 공간성이 서로 交叉(교차)되는 점에서부터 문화의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는 과거의 模倣者(모방자)도 아니요 세대의 추종자도 아니다. 그러나 과거를 폐기한 세대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과거의 완성자로서 새 시대를 창조한 분이다.

모든 족보는 부계 중심으로 되어 있어서 어머니 이름은 없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실린 예수의 계보에서 어머니 이름을 倂記(병기)한 것이 네 군데 있다. 무심코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깊은 의도에서 그렇게 한 것임이 확실하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셀라를,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이 오벳이 다윗왕의 할아버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이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가 나셨습니다”했다. 전체 문장의 구조형식으로 본다면 “야곱은 요셉을, 요셉은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는 예수를 낳았습니다” 했어야 자연스러웠을 것이 아닐까 싶어진다.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로서 짖궂은 여자였고,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꾼을 숨겨준 여리고의 창기였고 룻은 孝婦(효부)로 이름난 모압女人(여인)이었고, 마리아는 永遠(영원)한 聖母(성모)다. 이 모든 어머니들은 救援史(구원사)의 助投(조역)으로 이름을 남겼다. 누가가 기록한 예수의 족보는 그 이름들이 마태복음의 것과 일치되는 것도 없지 않으나 대부분 다른 이름들이며 순서도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다.

예수를 起點(기점)으로 하여 위로 거슬러 올라가서 하나님에까지 이르렀다. 마태는 왕통 중심의 왕가족보를, 누가는 서민 사이에 전해 오는 민간인 족보를 참고했는지 알 수 없으나 하여튼 족보책 자체가 다른 것이었을 것이다.

마태는 유대인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전하려는 의도였고 누가는 이방인 전부를 포함한 세계 인류에게 예수를 전하려는 의도였기 때문에 유대인 조상인 아브라함을 넘어서 첫 사람 아담에게까지 이르고 그 창조의 궁극점을 하나님에게까지 이어 놓았다. 지구의 연령이 20억 년이라면 그 始點(시점)에서 창조주 하나님에게까지 연결된 예수의 족보를 말한 것이다.

우리는 크리스찬 전통을 갖고 있다. 그것은 예수로부터 起算(기산)해도 2000년의 역사를 더듬는 것이며 전세계 교회의 공통된 유산이다. 여기에 구약시대까지를 친다면 창조의 시점에서부터 이어온 유산이다. 우리는 이 풍부한 말씀의 유산을 경시하고 천박한 ‘時代絶斷’(시대절단)을 云謂(운위)할 수가 없다. 예수의 족보 기록에서 우리는 우선 이런 것을 절실하게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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