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3일 목요일

[0906] 말씀을 새긴다 (4) : 시험 받은 예수

말씀을 새긴다 (4)
- 시험 받은 예수 -


[마태 4:1-11, 누가 4:1-13, 마가 1:12-13]

예수는 세례와 함께 ‘메시아’로 임직된 것을 스스로 의심하거나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자기 위에 내려오는 것을 보았으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하는 하나님 자신의 선언을 들었다. 이 선언에서 그는 자기의 신자격을 정립 받았으며 그것은 그대로 ‘메시아’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세례는 그에게 있어서 메시아로서의 ‘기름부음’의 상징이었다.

이제 그는 충일하는 성령의 능력을 느끼며 메시아로서의 사업을 시작해야 한다. 예수에게 있어서 ‘메시아’는 유대민족의 구원을 위한 다윗 왕조의 재건이라는 좁은 테두리에 국한된 개념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구원의 방법에 있어서도 유대인 지배 하에서 직접 정치적, 군사적으로 세계를 통합하고 경제적으로 부유사회를 만들고 종교적으로 유대교를 전인류의 통일종교로 삼는 등등의 유대적인 ‘게토’주의에 동조할 수가 없었다. 이런 것들이 인간 구원에 전혀 무용한 조건들일 것은 아니겠지만 그런 프로그램으로 메시아 사업을 진행시킬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메시아’가 다윗왕의 후손으로 태어난다는 예언에 대하여 예수는 반박했다(마태 22:41-45).

전 인류를 구원한다는 대원을 성취하려면 할 일이 태산같이 많았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다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필요하다는 모든 일이 똑같은 정도로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일에는 선후가 있고 本末(본말)이 있다. 가장 중요한 원칙이 서면 나머지 모든 것은 저절로 자리가 잡히는 법이다. 그 가장 중요한 원칙을 출발 이전에 확립시켜야 한다. 구약성서에서의 ‘메시아’상도 일정하지 않다.

이사야 53장의 ‘고난 받는 여호와의 종’의 모습도 당연히 ‘메시아’상에 들 수 있는 것이지만, 다른 데 기록된 메사아상과 너무도 동떨어지게 다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것을 메사야 예언으로 간주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에게 있어서는 그것이야 말로 진정 메시아가 걸어갈 길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하여튼 예수는 메시아 사업에서의 가장 중심적인 핵심을 확정하기 위하여 홀로 유대광야에 나가 40일을 금식하며 지냈다.

마가복음서에는 “성령이 예수를 몰아서 광야에 가게 했다”고 기록되었다(마가 1:12). ‘시험’은 예수의 메사아 사업에 있어서, 성령이 예수에게 강요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중요한 과정이었다. ‘악마’에게 시험을 받았다. 악마란 것은 모든 악의 세력을 총괄하는 형이상학적인 인격으로 되어있다.

구약성서에서도 처음에는 하나님이 모든 것의 유일한 주권자라는 의미에서 악의 근원도 하나님의 전능에 귀속시켰던 것이다. ‘모세’를 시켜서 ‘바로’에게 이스라엘 민족해방을 명령한 것도 여호와 신이었고 바로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들어 그 명령을 거역하게 한 것도 여호와 신이었다고 했다(출애굽기 9:12). ‘악마’가 독립적인 악신 구실을 하게 된 것은 페르샤 시대 이후의 일이라 한다. 페르샤의 선악 이신론에 영향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 인간악의 너무나 끈덕진 것을 통찰하는 때, 그것을 단순한 개인 인격 안에서의 실존현상으로만 다루기에는 너무 깊은 데가 있다. 그 신비한 근원을 인간 이상, 하나님 이하의 어떤 영적 존재자에게 귀속시킨다는 것은 옛날 사람들로서 당연한 얘기가 아니었을까?

바울은 그것을 ‘공중에 권세 잡은 자’(에베소 2:2) 라고도 했다. 오늘의 구조악도 그 비슷한 현상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와 유사한 역할을 행사하고 있다. 예수 당시에 악마의 객관적 실재를 의심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며 예수도 그렇게 믿고 이에 대결한 것이었다.

그것은 악의 가장 근원적인 세력에 도전하여 그 본거지부터 함락시켜야 한다는 태도여서(마태 12:29) 오늘에 있어서도 지극히 당연한 결단이라 하겠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악마가 감히 그를 시험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 아들인 예수가 악마에게 시험받는다는 그 자체가 예수를 격하시키는 생각이다 하는 선자도 적잖이 있을 법하다. 도대체 완전한 인간이요 완전한 하나님인 예수에게 시혐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권위주의적 사고방식의 완전주의자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면에서 더 깊이 논의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예수는 모든 일에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은 자이면서도 시험에 져서 죄에 빠진 일만은 없다. 그것이 우리와 다른 점이다. 한 히브리인서 기자의 말(히브리 44:15) 을 우리가 믿는다면 그 이상 더 思辯的(사변적)인 論究(논구)를 전개시킬 필요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 아들이거든……” 하는 것이 모든 시험의 전제로 되어있다. 이것은 ‘메시아’가 ‘메시아 사업’을 전개시키는 데 결부된 시험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일반인의 생활건설을 위한 방향설정에도 이 원리는 적용될 수 있으며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며 믿음을 생활하는 자의 당연한 법일 것이기 때문이다.

메사아로서의 예수의 앞에는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들이 광야에 돌들처럼 무수히 널려 있다. 사탄은 그 중에서 가장 그럴 듯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유혹이 되는 세 가지를 골라서 예수에게 권한다. 이것은 예수의 사업 계획 항목에 번개같이 삽입되는 측광이었다. 예수는 여기에서 어김없이 선택해야 한다. 선택행위 자체는 연약성이 아니요 특권이다. 잘못 선택한 때에는 능력부족이 입증되고 스스로 그 시험의 함정에 빠질 것이지만, 바르게 택했을 경우에는 흠 없는 능력자로서 더 높은 영광에로 승진한다. 예수는 끊임 없는 승리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하나님의 권능을 代行(대행)하는 최고의 특권에까지 승진된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예수가 대결한 세 가지 유혹을 살펴보기로 한다.

① 돌로 먹을 만들어 먹으라 -

예수 자신이 몹시 배고팠다. 40일 금식이란 餓死(아사)직전의 상태를 말한다. 주려 죽는 모든 인간들을 예수는 자기 자신 속에서 발견했을 것이다. 진실로 절박한 상태다. 배고파 뚱뚱 부어 죽어가는 數億萬(수억만)의 人間群像(인간군상) - “내게 빵 한 조각만!” 하고 내미는 손들을 거부하고서 구세주 노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우선 먹어야 하고 너도 먹어야 할 거 아니냐?” 하는 사탄의 속삭임 - 民(민)은 以食爲天(이식위천)이라는 동양 정치가들의 말은 지금도 적절하다. 경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 정치를 말할 수 없다. 예수는 육체를 가진 ‘人間’(인간)이요 우리도 다 마찬가지 존재자들이다. ‘산다’는 것은 40일 금식하고 극도로 쇠약해진 그 순간에 닥쳐온 현실문제로서의 삶을 의미한다.

육체를 가진 인간의 삶에서 빵의 공급을 제외하고 삶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여기서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하는 전적인 부정을 의미한 것이라고 볼 수가 없다. 떡으로 사는 인간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말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어서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한 구절에서의 ‘삶’도 떡으로 사는 삶에서의 삶과 동격인 의미에서 사용되었다. 말하자면 이원론적인 의미에서 肉(육)을 떠난 후의 영혼의 영생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日常生活(일상생활)에서의 삶을 의미한다. 예수는 이 대답을 신명기 8:3에서 인용했다. 신명기에서의 이 귀절은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만나’를 내려서 먹고 살게 했다는 기록에 대한 종교적 신앙적 의미 해명인 것이다. ‘만나’는 먹을 것 없는 광야에서 먹고 살 수 있었던 신기한 食料(식료)였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만든 빵에만 의존했었는데 하나님은 직접 ‘만나’라는 食料(식료)를 주어 먹게 하셨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日常生活(일상생활)에서 빵만 먹으면 다 되는 줄 아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먹어야 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

본지 창간호 ‘말씀을 새긴다’의 서론에서 詳述(상술)한 바와 같이 인간은 ‘動物’(짐승)이 아니기 때문에 본능에 의한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만으로 살 수는 없다. 정신적, 영적, 윤리적인 食糧(식량)인 하나님의 말씀이 빵과 함께 날마다 우리 몸 속에 섭취되어야 한다. 그래야 동물권을 넘은 정신권에서 ‘인간’으로서의 삶을 가질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현대 유물주의적 貪慾(탐욕) 자본주의는 인간이 빵으로만 산다고 自負(자부)한다. 유물론적인 공산주의자도 마찬가지 사고방식이다. 그래서 인간은 점점 본능만을 충족시키는 동물로 떨어지고 금전계정의 한 항목에 끼어들어 기계같이 물건같이 다루어진다. 물건은 많아졌으나 인간은 상실되어 간 데마다 倦怠(권태), 虛無(허무)를 永嘆(영탄)하는 절망인간들이 우글거리게 되었다. 예수는 빵과 말씀을 함께 먹어야 참인간으로 살게 된다는 것을 그 출발에서부터 명시했다. 이 둘 중에서도 서열을 따진다면 ‘말씀’이 앞선다. 인간의 인간됨은 정신성에 있기 때문이다.

② 성전 처마 끝에서 내려 뛰라는 유혹이다. 이것은 하나의 사회 운동에 속한다. 악마는 하나님의 보호를 강조한 시편 91편 11, 12절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지를 명하사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라”한 말씀을 인용하면서 신앙적으로 유혹한 것이었다. 너는 하나님 아들이니 성전 꼭대기에서 내려 뛰어도 하나님이 시편 91:11-12에 말씀하신 대로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너를 붙들어 주실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보호하시리라 해서, 그렇게 하잖으면 안될 긴박한 경우도 아닌데 일부러 그런 일을 해 본다는 것은 그 자체가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보는 일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다면 그것 때문에 인기가 올라가서 ‘하나님이 특별히 보호하는 인간’이라는 선전이 저절로 될 것이고 민선 제왕으로서 천하에 선정을 베풀 수도 있잖느냐 하는 유혹일 것이다. 예수님의 선교 기간중 예수의 기적을 본 민중은 수천 명씩 몰려 예수를 따라 다녔다. 그들은 예수를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고 했다(요한 6:15). 그만하면 민중에 대한 예수의 인기는 대단한 셈이다. 그러나 예수는 군중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시고 그들의 병을 고쳐 주신 것 뿐, 그들의 어깨에 올라 탈 생각은 하지 않으셨다. 그들을 사랑했으나 그들을 의지하지 않았다. 그들을 위하면서도 그들에게 위함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 버림받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소리를 들을 것을 처음부터 각오하고 계셨다. 이것은 광야의 시험에서 이미 작정된 방향을 꾸준히 걸은 것이라 하겠다.

③ 악마에게 절하면 천하와 그 영광을 준다는 유혹이다. 이것은 직접 정권을 주제로 한 것이다. 천하를 평정하고 영광을 누리는 제왕권의 유혹이다. 이것은 악의 세력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고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현재까지의 인간역사는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에게 있어서는 手段(수단)이 목적보다 더 중요했다. 바른 수단으로 의를 追究(추구)하다가 죽음에 이르러도 그것은 실패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의한 수단으로 의로운 열매를 거두려는 것은 전적으로 거부했다. ‘엉겅퀴에서 포도를 딸 수는 없다’ - 나쁜 수단에서 좋은 목적이 이루어질 까닭이 있겠느냐? 하는 방향이었다. 미국에서 黑奴(흑노)의 피로 풍요를 거뒀다. 그것은 행복이 깃들인 열매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거기에 해당한 보응의 열매를 거두고 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을 두려운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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