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3일 목요일

[0907] 말씀을 새긴다 (5) : 나사렛에서의 첫 선언

말씀을 새긴다 (5)
- 나사렛에서의 첫 선언 -


[누가 4:16-22, 마태 13:53-58, 마가 6:1-6]

예수가 예루살렘과 유대지방을 거쳐 갈릴리 호수지방에서 선교 활동을 하시다가 고향인 나사렛으로 가신 것은 얼마 후의 일인 것 같다. 그것도 물론 선교 초창기의 일이기는 했지만, 맨 처음부터 고향을 방문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 사실이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고향 나사렛에서 된 일을 간략하게 적었을 뿐이다.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는 것, 사람들이 그 가르침에 놀랐다는 것, 저 사람이 언제 저렇게 유명하게 됐단 말이냐? 하여 멸시했다는 것, 예언자가 고향에서 대접받는 일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 예수가 떠나갔다는 것 등등이다. 나사렛 회당에서 무엇을 가르쳤다는 내용은 누가 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의 선교 방향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대한 의미를 가진 귀절이다. 그러므로 누가는 그 말씀하신 내용을 일부러 조약해서 우리에게 보도해 준 것이라 하겠다.

예수는 여기서 안식일에 규례대로 회당에 갔다고 했다. 나사렛에서 사실 때에 언제나 나가시던 회당인 모양이다. 회당에서는 장로가 주재하지만 성경강해 같은 것은 회중의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성경 말씀을 읽고 풀이하는 순서를 맡았다.

그는 이사야 예언서를 펴서 61:1-2절을 읽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하시고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부으심은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심이다.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심은 마음 상한 지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며, 갇힌 자에게 해방을 전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심이라…”(이사야 61:1-2).

다 읽고서 그는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사람에게 되돌려 주고 앉으셨다. 회당에 모인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에게 쏠렸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이 성경 말씀이 오늘 너희에게 이루어졌다” 하고 말씀했다.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고 그의 은혜로운 말씀에 놀랐다는 것이다. 그는 아마도 ‘이 성경 말씀이 오늘 너희에게 이루어졌다’ 하는 말씀을 줄거리로 해서 여러 가지로 친절한 해설을 더 많이 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은혜로운 말씀에 놀랐던 것이라 생각된다.

예수께서 30년이나 살던 고향 동리에 왔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애정과 사명과 진실을 그 가장 친근한 이들에게 알려 주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의 선교의 주제를 거기서 발표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가장 진실한 자기 고백이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갈릴리 호숫가 가버나움 등지를 거쳐서 나사렛으로 오셨기 때문에 나사렛 사람들도 예수의 놀라운 기적 행위에 대하여 듣고 있었을 것이다. 정상적으로 생각한다면 자기 동리 사람이 그런 위대한 기적을 행하고 선생님이 되어서 하늘나라 진리를 가르치고 한다면 모두들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멸시하고 저 사람이 우리가 잘 아는 아무개 아들이 아니냐? 누구 누구의 형제가 아니냐? 저 사람이 언제부터 저렇게 유명하게 됐단 말이냐? 하고 빈정대며 마감에는 끌고 가서 벼랑에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까지 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불신앙을 “이상하게 여기셨다”고 마가 6:6에 기록되어 있다. 인간들의 악한 맘 뽄새란 진실한 인간의 심정에서 본다면 ‘이상하게 여길’ 밖에 없도록 비뚤어져 있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는 이사야 예언서의 문구들을 그 본뜻대로 이해해야 한다. ‘가난한 자’란 것은 貧民(빈민), 특히 빈농 ‘흙의 백성’이란 이름으로 멸시받는 하급 인간들이다.

‘기쁜 소식을 전한다’ 여기서 ‘기쁜 소식’이란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해방된 기쁜 소식을 의미한다. 이 기쁜 소식을 한시라도 더 속히 본국의 예루살렘에 전하려고 전령자(傳令者)는 달린다. 여기서 ‘기쁜 소식’이란 말을 후에 바울이 율법과 대조하는 의미에서 사용한 ‘복음’과 혼동하는 것은 잘못이다. 여기서는 단순한 ‘기쁜 소식’이다. 빈민들에게 전해지는 기쁜 소식이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을 빈곤에서 해방하는 일, 침략군에게 짓밟힌 그들을 자유하게하여 나라를 되찾아 준다는 소식,, 사회적으로 유린된 천민대우에서 여호와가 직접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 -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한다는 것 – 이런 것들이 실질적인 ‘기쁜 소식’이다.

‘포로된 자에게 自由(자유)를’ - 지금도 세간에서 말하는 ‘포로’를 말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에 잡혀 가서 51년이나 포로생활을 하였다. 얼마나 해방을 갈망했겠는가? “갇힌 자에게 열어줌을…” - “눈먼 자에게 눈 뜨임을…”이란 귀절은 문맥에 맞지 않는다. 히브리말 ‘페콰흐코아흐’는 ‘연다’는 뜻임에 틀림없다. 창 21:19, 왕하 6:20, 이사야 42:7 등에는 눈을 연다, 말하자면 ‘눈을 뜬다’는 데 사용했고 이사야 42:20에는 ‘귀가 열린다’는 뜻으로 썼다. “갇혀 있는 자들에게 문을 열어준다”하는 것은 그들이 토굴 속 캄캄한데 갇혀 있어서 보지 못하였는데 이제는 옥문을 열고 그들의 눈이 볼 수 있게 해준다(Dillmann)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눌린다’-는 마음 상한자, 기가 꺾인 자, 탄식과 슬픔에 잠긴 자 등을 말한다. 그런 사람들은 의사가 상처를 싸매 주듯이 고쳐서 기를 북돋아주고 심신이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한다는 말이다.

“이 성경 말씀을 읽고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회당 집사에서 주었다.” - 요새로 말하면 책을 덮어 회당 집사에게 내 주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에게 ‘책의 종교’가 끝난 것이다. “옛날부터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에 걸쳐 여러 방법으로 말씀하셨다”(히브리 1:1). 그 말씀들을 기록하여 책으로 만들었다. 특히 바벨론 포로생활 중에 그것이 종합 편찬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포로에서 돌아와 제2성전을 짓고 포로 후 유대교로 재출발할 때에는 이 ‘책’에 수록된 ‘토라’(모세五經)와 예언서 등이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 최고의 권위로 등장하여 시간과 함께 더욱 굳어져서 예수 당시의 바리새와 율법주의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래서 ‘살아 계선 하나님’은 배후 또는 권외에 물러서고 기록된 율법과 규례 – 심지어는 그 율법의 주석 내용까지가 하나님의 權座(권좌)에 대신 등극했던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만든 전통을 하나님의 계명 위에 군림하게 하고 있다”(마태 15:3-6)고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다.

이렇게 굳어진 ‘책의 종교’를 예수가 덮어 버렸다. 그것을 말아서 회당 시중꾼에게 주었다. 이 책의 종교는 유대교 회당종교의 권위일지는 몰라도 예수의 권위는 아니게 되었다. 이제부터의 권위는 예수 자신이다. “그의 말은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의 그것과 같지 않고 권위 있는 자의 말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놀랐었다”(마태 7:28)고 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에게 이루어졌다.”

내가 기름부음을 받고 보냄을 받아 이 말씀을 너희에게 이루어지게 한다. 나는 이 말씀을 성취하러 온 사람이다 하고 선언했다. 그는 예언자가 아니라 모든 예언의 성취자다(마태 5:17). 이제 그는 책의 종교를 살아계신 하나님 아들의 종교로 완성한다. 고정된 기록종교에서 자유하고 자율하는 인간종교, 창조하는 생명이 그 자체 안에서 강 같이 넘쳐 흐르는 인간들의 산 종교로 만드는 것이다(요한 4:14).

기독교회는 과연 예수의 이 가장 핵심적인 선언에 충실하고 있는가? 충실하려고 노력이나 제대로 하고 있는가? 사도 시대에는 예수의 목격자들이 예수의 모습을 생동적으로 ‘푸레젠트’ 할 수 있었고, 성령의 자유로운 감화가 인간들의 마음속에서 창조적으로 역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문에 고정되는 일이 없었다. 그 때에는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약성경이란 것도 없었다. 그들의 성경은 구약성경이었는데, 그들은 성경에서 예수의 모습을 찾는 데만 관심을 집중시켰고 율법조문, 의식과 규례, 제사제도 등등에는 적극적으로 반발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을 떠났고 회당에서도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전은 물론 기원 70년에 아주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으니까 두말할 것도 없고 각처에 있는 회당에서도 그들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들은 유대교 회당에 들어맞기에는 너무 자유스럽고 너무 생명적이었으며 그 ‘비전’이 너무 컸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도 시대 이후 교부 시대를 거쳐 로마 카톨릭 시대에 이르면서 교회는 권력과 조직과 신앙통제 등등으로 다시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예수의 종교라고 할 수 없는 기독교가 판을 치게 되었다. 이에 견딜 수 없는 신앙인들이 개혁 운동을 일으켜 루터의 때에 어느 정도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덧, 그 거대한 개혁자들 – 루터, 칼빈 등등도 세상을 떠나고 세계를 흔들만한 두드러진 인물도 없는 데다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반격은 더욱 강력해졌다.

그래서 17세기에는 권위의 문제가 교회의 핵심문제로 등장했다. 카톨릭에서는 그 방대한 조직체인 교회와 그 조직체를 운영하는 – 그리스도의 대행자로 공언된 절대 권위인 법왕이 있어 일사불란하게 전투태세를 정비하고 진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개혁교회에서는 조직체도 시원치 않고 그 조직체를 지도할 인물도 결핍한 처지에 있었으니 무슨 권위로 카톨릭에 대결할 수 있을까? 그래서 그들은 ‘성서’를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으로 삼고 성서는 문자 그대로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니 그 말씀에 맞지 않는 신앙과 행동을 발견하는 때에는 법왕이고 누구고 간에 정죄하고 심판할 수 있다고 내세웠다. 그러니까 카톨릭에서 법왕을 교회의 최고 권위로 내세운 대신에 개혁교에서는 성서를 교회의 최고 권위로 推戴(추대)한 것이 된다. 물론 말로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최고 권위를 말하지만 실지로 현실사건에 부딪힐 때에는 “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지 않으냐?” 하는 것으로 대결한다. 그러려니까 성서는 逐字的(축자적)으로 무오여야 하고 그 해석도 하나로 고정되어야 한다. 그래서 성서문자 무오설이 나오고 정통주의신학 관계가 생겨난 것이다. 이제는 성서가 요지부동, 영원불변의 객관적 물상적인 ‘聖物’(성물)로 지성소에 안치되고 교회는 사실상 그것을 예배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말하자면 다시 더욱 철저한 ‘책의 종교’로 전락한 것이었다. 그래서 카톨릭에서는 “우리는 그래도 인간법왕을 권위로 모시는데 너희는 인간도 못되는 물체인 책을 권위로 모시고 있지 않느냐?” 하고 야유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한다.

이제 우리는 이 ‘책의 종교’에서 탈출(Exodus) 하여 예수 자신에게로 돌아가야 하겠다. 경전과 조직과 규칙과 의식 등등이 아주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살아계신 예수를 그 속에 幽閉(유폐)하거나 사실상 예수 없는 그런 것들을 지키고 있거나 하는 교회여서는 안되겠단 말이다.

예수께서 고향 나사렛에서 선포한 말씀을 교회에서는 영적, 정신적으로 해석하려고 애썼다. ‘가난한 사람’이란 것도 마음이 가난한 지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사실 예수의 山上垂訓(산상수훈)에서도 맨 처음에 기록된 것이 ‘八福’(팔복)이고 그중에서도 제일 먼저 선언된 것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누가 6:20) 하는 귀절이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

문서비판학적으로 보아 팔복기사는 누가복음의 것(6:20-26)이 더 진실에 가깝다.

그리고 ‘포로된 자’도 악마의 손에 사로잡힌 者(자), ‘갇힌 자’도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 ‘눌린 자’ - 죄와 사망의 위협에 억압된 인생 등등으로 해석해서 ‘정신적’이라는 아름다운 무지개 속에 승화시키고 현실로서의 가난한 자, 포로된 자, 눌린자, 갇힌 자 등등에는 너무 ‘세속적’이라는 생각에서 접근도 하려 하지 않는다. 이 세상은 잠깐 있는 꿈같은 비현실이요, 사후천당이 우리의 영주처라는 생각, 고생하든 잘 살든 육체는 무익한 것이니 정신적, 영적인 의미만을 추구하는 것이 종교인다운 ‘거룩’이라는 생각 등등을 강조한다. 정말 그렇다면 예수가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 태어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이 되고 성령이 몸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 방안이요 예수의 선교원칙이었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현실에서의 사건을 통하여 비유 형식으로 가르친 것은 일상생활에서 친숙한 사물들을 통하여 정신적 왕국인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정신적인 왕국이 현실의 사위와 상통하는 하나의 Reality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하신 일이다. 가령 ‘씨뿌리는 비유’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가 ‘씨’요 토양이 ‘인간성’이고 ‘씨뿌리는 사람’이 선교자라면 그 둘이 근원에서 상통하는 것이 없고서는 비유가 성립될 수 없을 것이고- 이 둘이 하나의 Reality로 결실하기 전에는 선교자의 거둘 것도 없을 것이다. 예수는 인간의 정신화보다도 정신의 인간화를 노리고 있다. 그래서 우선 있는 그대로의 인간들에게 몸으로 접촉하고 그들의 문제들을 같이 짊어진다. 직접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고 포로가 된 자, 눌린 자, 갇힌 자, 병자, 죄인 등의 친구가 되어 그들의 인간됨에 자유와 해방과 바른 성장을 가져오게 하신다. 역사의 현실에 직접 부딪히지 않고서 ‘정신’이란 껍질 속에 도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稅吏(세리)를 찾고 나환자를 고치고 정신병자를 낫게하고 창기들을 하나님의 딸들로 만드셨다.

교회의 선교가 타계적인 데에 ‘타켓’을 설정하고 인간들의 관심을 거기에 집약시킨다는 것은 비예수적이다. 교회는 세상에 나가야 한다. 예수와 함께 현실의 전선에 나가야 한다. 그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라’는 명령에 따를 각오를 새롭게 할 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예수를 따르려면 그 길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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