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3일 목요일

[0909] 말씀을 새긴다 (7) : 예수의 메시아 의식과 메시아 예언 이해

말씀을 새긴다 (7)
- 예수의 메시아 의식과 메시아 예언 이해 -


[I] 예수의 메시아 의식

예수의 공생애는 그가 ‘메시아’라는 자의식 아래서의 생활기록이라 하겠다. ‘마태’나 ‘누가’의 예수 탄생설화가 ‘메시아’로서의 탄생을 말하려는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그것을 제외한 마가복음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합니다”(마가 1:1)한 간단한 서론에서도 예수가 메시아란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리스도’란 말은 히브리어의 ‘메시아’란 말을 번역한 헬라어다. 예수 자신의 선교도 그 첫 출발부터 자기가 ‘메시아’라는 것을 전제로 한 선교였다. 그의 受洗時(수세시)의 경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란 하늘의 증언을 들었다는 것은 그가 메시아란 것을 말함이었고 광야의 시험도 ‘메시아’로서 악마적 세력에 대결 승리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선교 중에 예수께서 자기가 ‘메시아’란 것을 공포하거나 선전하는 것을 억제한 것은 그 당시의 거짓 메시아들인 ‘열심당’ 폭력독립운동자들 - 과 혼동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를 보내어 “오실 분이 당신입니까? 그렇잖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2-2) 하고 예수에게 물었을 때, 예수는 “너희가 본 대로 가서 말하라 … 내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마태 11:4-6)고 했다. 이것은 예수의 메시아적 성격에 대한 요한의 이해부족을 은근히 책망한 말씀인 것 뿐이요 예수 자신의 메시아 의식 자체에는 야무 변동이 없음을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베드로의 신앙고백(마태 16:13-19, 마가 8:27-29, 누가 9:20),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태 16:16)한 귀절들에서 그의 메시아격을 볼 수 있다. 제일 먼저 쓰여진 마가복음이 제일 간단하게 되어 있다. 시간이 감에 따라 신자의 신앙고백이 보충되어서 더 길어졌을 것이라 할지라도 예수가 곧 ‘그리스도(메시아)’라 하는 것만은 공통이며 예수는 이 대답에 대하여 만족한 뜻을 보였다고 했다(마태 16:17-20). 마가복음에서는 “이 말을 공개하지 말라”고 당부했고 누가복음에서는 자기의 메시아적 성격은 ‘수난의 종’ 모습이므로 제자들도 고난의 길을 함께 걸어야 한다는 것을 분부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의 십자가에의 각오는 수난 속죄의 메시아상을 이루는 과정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자신의 메시아로서의 성격은 당시 유대인들의 그것과 같지 않았으나 그가 ‘메시아’라는 자의식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제자들도 그렇게 믿었으며, 바울은 ‘크리스찬’이란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 즉 ‘메시아’임을 믿는 데서부터 성립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선교강령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려는 데 있었다.

예수는 “이제 때가 찼다”고 했다. 지금은 예언으로 기다리고, 약속으로 기다리게 하는 때가 아니라, 그 예언과 약속이 이루어지는 때란 말이다. 그것을 이루는 사람은 예수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율법과 예언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예언을 이룬다는 데는 특히 메시아 예언을 자기가 완성한다는 것을 중점으로 했다. 장차 올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을 말한 것이 ‘메시아 예언’이다. 이 메시아 예언은 히브리 모든 예언의 중심이며 그 정상이다. 히브리시와 역사와 설화가 모두 메시아적 이상의 구조 속에 들어 있다. 성서는 메시아 사상이라는 질로 재봉된 의복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메시아 의식과 예수의 메시아 왕국(하나님의 나라)을 말함에 있어서 가장 기초되는, 구약의 다양한 메시아 예언들과 예수 자신의 이에 대한 이해를 파악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메시아 예언의 발전된 역사와 메시아와 메시아 왕국의 다양한 성격, 그리고 그 다양성 가운데서 예수가 골라낸 참된 메시아와 메시아 왕국의 성격 등등을 탐색하여 예수의 모습 이해에 이바지하려 한다.

[II] 구약 메시아 예언 발전의 역사

① ‘메시아’란 말은 히브리어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 왕이나 대제사장의 취임 예식에 관계된 말이다. 머리에 기름을 부어 그가 그 직위에 취임한 것을 표시한다. ‘메시아 예언’이란 것은 하나님이 어떤 특정한 시기에 초인간적인 거룩하고 강력한 이상적인 왕자를 보내여 이스라엘을 역사적, 인격적 비참에서 구출하고 이상적인 세계왕국을 세운다는 약속과 소망을 선포하는 예언을 말한다. 이것은 성서의 ‘출애굽기’에서 그 놀라운 실례를 보았으며 더 완전하고 광범한 출애굽 사태를 예상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메시아 예언의 바탕은 a) 하나님이 역사에 관여하신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 관여는 직접적인 것을 원칙으로 했다. b) 그 관여는 악과의 대결과 투쟁의 계속이다. c) 그것은 역사의 무대에서 점차적으로 진전된다. d) 하나님의 역사 관여는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이 역사 안에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승리로 끝난다.

이런 일반적언 경륜은 당초부터 있었다. Protoevangelium(창세기 3:15)이 J문서에 속한다면 그것은 기원전 9세기, 최고에 속하는 기록이다. 거기서도 인간의 타락이 외부로부터의 유혹과 인간 자신의 향응에서 생겨지는 것임을 말하고 뱀(악마)과 여자의 후손과의 사이에 끊임 없는 대결과 투쟁이 있을 것을 말했다. 하나님 나라는 약탈자 같이 마구 쳐들어가는 자가 얻는다(마태 11:12). 약탈할려면 그것을 지키는 제일 힘센 자부터 때려 눕혀야 그 집에 들어가 약탈할 수 있다(마태 12:29)고 예수께서도 말씀하였다. 메시아 왕국에 관하여 언제나 재난과 전쟁과 피와 살육의 예언이 앞서는 것은 그만큼 악과의 대결이 첨예화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기 때문이다(마태 11:34-39 참조). 얼버무린 타협이나 안일한 무사주의나 비겁한 평화주의나 불의에 대한 침묵 등등을 전제로 한 메시아 왕국 건설은 성경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다.

하나님이 역사에 관여한다는 것은 우선 하나님의 선택 공작에서 나타난다. 그는 카인과 아벨에서 아벨을 택하고, 후손 중에서 노아를 택하고, 노아의 그 후손 중에서 셈을, 셈의 후손에서 아브라함을, 아브라함의 후예인 야곱의 자손 열두 지파로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하여 그 민족을 선민으로 삼아 직접적인 메시아 왕국 건설 - 세계사의 진행에 활촉끝 구실을 하게 했다. 이스라엘 민족과의 관계는 출애굽사건에서 그 출발과 행방과 행동을 규정지었다. 그것은 하나의 인간해방 운동이었다.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에서 탈출하여 하나님의 백성인 자유인이 되게 하고 그들로 이상의 나라, 메시아적인 왕국을 건설하게 하려는 운동이었는데, 그 구조는 신정체제였다. 하나님이 친히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만나를 먹이시고 훈련시키셨다. 소명받은 지도자는 ‘모세’였으나, 그는 하나님의 심부름군으로 자처했고, 자기를 왕이나 장군으로 생각한 일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기를 바랐고 또 그렇게 행동했던 것이다. ‘신정’ 의식은 그 후에도 줄곧 계속되었다. 사사 시대도 신정이었고, 사울왕을 옹립할 때에도 왕권이 신권을 침해할까봐 일부에서는 심각한 반대운동이 있었던 것이다. 왕조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왕은 신정체제 안에서 정치를 하청맡은 것이어서 언제나 선정에 심판을 받아야 했으며 예언지는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그 점판의 선포자 노릇을 했던 것이다. 출애굽은 하나님이 직접 인간을 노예에서 구출하여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으로 훈련시켜 하나님의 나라, 신정왕국을 세우게 하려는 운동이었으며 역사 안에서 계속 발전할 메시아 사상의 토양이 된 것이었다.

출애굽 시대에 모세가 있었던 것과 같이 왕국 시대에는 왕이 있고 메시아 왕국에서는 이상왕인 메시아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 이상왕의 그림자로서 ‘다윗’을 쳐다 보았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국가체제를 확립한 사람으로서 왕이면서도 진실한 하나님의 종이었고, 전략과 정치에 비상한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심이 열렬했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통회하고 용서를 구하며 공의와 긍휼과 지혜로 나라를 다스리고 인국을 정복하여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는 나라로서의 위신을 떨쳤다. 그래서 그의 모습에서 메시아의 모습을 추출하여 더욱 이상화하는 것이 상식화했던 것이다.

② 다윗과 메시아 예언

포로 이전 시대에는 다윗왕조가 아직도 존속 중이었으므로, 다윗왕조 재건이라는 메시아 사상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학계의 정론이다. 그러나 다윗을 모형으로 메시아상이 생성 발전했다는 것은 포로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포로 이전의 문서예언자들, 특히 이사야, 예레미야 등등은 다윗 왕조의 붕괴를 확실히 예견했기 때문에 그들의 메시아 예언이 더 이상적인 다윗왕국이 미래의 메시아 예언으로 영상되었을 것은 사실이라 하겠다.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이사야 7:10-17) 같은 것은 시리아ㆍ이스라엘 연합군의 예루살렘 포위라는 국난에 처하여, 신정 대행자인 왕은 더욱 여호와 신앙에 의존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왕인 아하스는 비밀로 앗시리아에 구원을 청하는 불신앙을 감행하였으므로 그것을 책망하는 표적으로 선포한 예언이다. 그러므로 그 예언은 아하스와 대조적인 참신앙의 왕,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고 할만큼 하나님과 일체된 왕이 불과 수년 내에 탄생한다는 것을 예언한 것이었다. 이런 성질의 예언은 포로 이전에도 있을 수 있는 메시아 탄생 期待(기대)가 아니었을까? 결국 나라는 망하고 백성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잡혀갔다. 그러나 그렇게 역경에 빠질수록 메시아 기대는 더욱 열렬했다. (물론 탈락자도 많았겠지만 지도충과 신자 그룹은 더욱 분발했었다) 다윗 왕국이 재건된다,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으로 탄생한다, 그의 탄생할 고장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이다, 그는 ‘이새의 뿌리에서 난 가지다’ 등등의 예언은 포로 전후를 통하여 발전된, 다윗 관계의 메시아 예언이다.

③ ‘여호와의 날’과 메시아 왕국의 윤리화

주전 8세기, 예언자 아모스의 시대만 해도 사람들은 ‘여호와의 날’을 안타깝게 기대되고 있었다. ‘여호와의 날’이란 것은 메시아 왕국 來臨(내림)의 原始形(원시형)이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선민이므로 옳든 그르든 여호와는 그들 편에 서신다’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전쟁이나 침략이 있을 때에는 여호와가 직접 전쟁의 선두에 서서 적을 섬멸하고 이스라엘을 이기게 하신다는 날이다. 그 날만 오면 우리는 족하다 하는 태도였는데 아모스는 “너희가 왜 여호와의 날, 여호와의 날 하고 기다리느냐? 여호와의 날은 암흑이요 사망이다”(아모스 5:18). 왜냐하면 너희가 범죄자들이니만큼 그 날은 너희에 대한 심판의 날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는 것이었다. 이것도 포로 이전의 메시아 예언에 속한다.

④ 메시아의 성격

a) 무엇보다도 먼저 메시아는 왕이다. 이사야가 말한 ‘네 겹 이름’(이사야 9:6) - ‘놀라운 모사자’(Wonderful Counceller), ‘신적인 영웅’(엘기볼 – 히브리어), ‘노획물의 분배자’(호비어의 애비애드에서 ‘애드’를 이사야 33:23, 창 49:27, 스바냐 3:8 - 등에서와 같이 ‘노획물’로 이해한다면), ‘평화의 왕’에서도 그는 정복자로 개선하고 평화를 확립하는 이상적인 왕이며 ‘그 어깨에 정사를 멘’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의 군사를 바닷 속에 장사하고 이스라엘을 구출하던 출애굽 때의 여호와를 염두에 두고 그의 대행자였던 모세를 더욱 이상화하여 메시아 상을 정립시킨 것이라 할 수 있으며 , 각군 다윗의 생애와 업적과 그 인격을 이상화하여 이상왕인 메시아상을 상정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여튼 이것이 가장 보편적으로 기대된 메시아상이었다.

b) 다니엘서에 나오는 인자 같은 이의 영원한 나라가 있다(다니엘 2:31-45, 7:2-27). 그것은 다른 제왕들은 모두 짐승으로 상정되었는데 마감에 ‘인자 같은 이’(One like a son of man) 가 나와서 짐승과 대조되는 인간,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 곧 하나님으로부터 왕권을 받는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메시아상은 ‘참 인간’으로서의 왕이다. 예수가 자신을 ‘인자’라 한 것은 여기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참 인간인 메시아’란 의미에서 예수에게 수용될 수 있는 타이틀이라 하겠다.

c) 여호와의 종(이사야 15:20, 42:1-13, 53), 특히 수난의 종으로서(이사야 53장)의 메시아상을 본다. 이것은 너무 동떨어지게 다른 사상이어서 이상왕으로서의 메시아상과는 관련시킬 수 없기 때문에 유대교에서는 이것을 메시아 예언에 계상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여호와의 종’이란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사야 53장 같은 것은 너무나 Personal한 경험이 부각되어 있어서 민족이라는 집단의 협동인격에 적용시키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민족으로서의 ‘종’이 개인적 메시아 Personal Messiah로서의 ‘종’으로 옮겨지지 않고서는 납득이 안간다. 그러나 예수의 인격에서 이스라엘 민족전승과 하나님의 말씀과의 두 가지가 한 몸으로 이루어진 것을 생각한다면 이사야 35장을 예수에게 그대로 맞추어 읽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예수는 ‘수난 죄의 종’으로서의 메시아인 때에만 ‘참인간’으로서의 메시아라는 신념에서 자신의 메시아상을 정립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⑤ 메시아 왕국의 성격

신정 제사장의 나라, 거룩한 나라(출 19:3-6)로 되어 있다. 여호와 임재의 상징적인 고장은 지성소며 영광으로 머문다. 중보자는 제사장이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대언하는 점에서는 에언자가 있어 그 신의를 선포한다.

a)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한 정치적 군사적 세계 통일과 보편왕국의 건설, 그리고 공의와 긍휼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과 여호와의 법도로 다스려 그 권왕과 나라가 영원무궁하다는 것이 통속적인 메시아 왕국의 성격이다. 주로 포로 이전 시대의 사상이다.

b) 그러나 나라가 망할 무렵에 예언자 예레미아는 ‘새 언약’(예레미야 31:31-34)을 선포했다. 그것은 법의 내면화, 인격화, 그리고 救濟(구제)의 선포 등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포로 중의 예언자인 에스겔은 이것을 더욱 발전시켜 이른바 개인종교의 기반을 확립했다. 신앙은 각개인과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시종하는 것이요 다른 아무 외적 조건도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포로 중에는 나라도 성전도 제사도 있을 수 없고 오직 포로생활 중의 이스라엘 백성이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관계가 끊겨질 수는 없는 처지였으므로, 예언자 에스겔은 각개인과 하나님 관계만을 기본 조건으로 삼았던 것이다. 따라서 각개인이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 특히 윤리적인 조항들을 지키면 하나님이 그를 자기 백성으로 축복하실 것이고 ‘남은 백성’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실 것이라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시 나라와 성전과 제사를 회복해 주실 날도 올 것으로 믿고 에스겔은 회복도 예루살렘과 성전과 왕궁의 설계도까지 꾸며 놓았던 것이다.

포로생활 50년이 끝나는 무렵 페르샤의 Cyrus가 폭풍우같이 쳐들어와 바벨론 제국이 일시에 넘어지자 Cyrus대왕은 모든 포로된 피정복 민족들을 해방하고 고국에 돌아갈 수 있게 하였다. 이 무렵의 예언자(제2이사야, 40-60장)는 이제야 여호와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다스리며 목자가 양을 먹이듯이 먹여 주실 때가 왔다 하여 ‘기쁜 소식’의 ‘메신져’로서의 노래를 외쳤다. “이 기쁜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소리를 높여라”(이사야 40:9-11) 하고 환성을 올린 것이었다.

이리하여 스룹바벨이 총독이 되고 요수아가 제사장이 되어 이스라엘 귀환부대를 이끌고 고국에 돌아왔다. 돌아올 때에 그들은 포로 중에 말끔히 정리한 ‘토라’와 예언서들을 가지고 왔을 것이다. 그들은 이제부터는 여호와의 율법을 충실히 지켜서 다시는 여호와를 노엽히지 않아야 한다는 맹세를 했다. 그들에게는 왕이 없었고 다만 제사장이 있었으며 민정관 비슷한 구실을 맡은 스룹바벨이 있었다. 돌아온 이스라엘은 소수였으며, 돌아와 본 예루살램은 온전한 폐허였다. 숲과 풀이 우거지고 여우가 제멋대로 활보하고 간 데마다 집더미 같은 돌들이 무너져 뒹구는 고장이었다. 그들은 성전을 재건하려 했지만 20년이 다 되도 어쩌지를 못했다. 자기가 먹고 살 방도도 막연한데 어느 해가에 성전을 지을 수 있겠으며 무슨 수로 지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예언자 에스라, 느헤미야의 독려로 결국에는 자그마한 성전이 이룩되었다. 백성들은 에스라의 주재 하에서 통곡하며 여호와께 맹세했다. 이제는 율법을 충실히 지키겠노라고.

이에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 왕국 사상은 막후로 감취어지고 제사장의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율법의 나라가 무대에 등장했다. 이 제사장의 나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219 B.C. 에 시리아의 안티오커스 대왕에게 병합되어 헬라문화냐 히브리종교냐의 양자 택일의 최종 결단선에 이르렀을 때 마카비 형제가 단연 반기를 들고 안티오커스 대왕의 군대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여 마침내는 안티오커스로 하여금 손을 들고 히브리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게 하였다. 마카비가 제사장권과 왕권과를 함께 점유했으나 미구에 실패했고 이 무렵부터 바리새파라는 극단의 율법주의자들이 득세했다. 그래서 예수 당시의 히브리인 사회는 친로마파인 사두개파가 성전 안의 제사장 특권을 점유했고 히브리 민족 전통에 뿌리박은 바리새파 사람들은 각 지방에 퍼져 있는 회당의 지도권을 장악하여 하나의 종교왕국을 경영했던 것이다. 정치계로 말하면 친로마파로서 에돔 사람인 헤롯이 분봉왕이 되었고 예루살렘은 친로마인 총독의 직접 관할 하에 있었다. 정작 히브리인 자신들에게는 왕권이 없었고 하나의 피정복 민족으로 지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탈선적인 메시아 사상과 운동이 각처에서 일어났다.

① 무력 또는 폭력으로 로마에 반항하여 소수의 결사대로서 게릴라전을 전개하는 반란이 지주 있었다. 이것을 통틀어 ‘열심당’(Zealots)라고 한다. ‘열심당’ 반란에 대한 로마의 탄압과 토벌은 무자비한 것이었다. 이 ‘열심당’ 운동의 배후에는 종래의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 사상과 마카비 시대의 승리에 대한 鄕愁(향수) 같은 것이 있어서 주동자는 스스로 메시아라 칭하고 그 운동은 ‘메시아 왕국’이라 했으며 당면한 전투는 로마와의 대결이었다. 오스카 쿨만(Oscar Cul1man)은 예수의 운동을 이 ‘열심당’ 독립운동과의 관계에서 설명하려 하고 있다. 예수 자신은 열심당에 관계하지도 않았고 열심당의 행동 강령에는 반대하는 태도를 취했었지만, 예수의 제자들은 거의 전부가 열심당원이거나 열심당 출신이거나 했다는 것이다. 그 중 한 사람 ‘시몬’은 아예 ‘열심당원’임이 명기되어 있고 유다도 열심당원이었다고 한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등등도 열심당에 인연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 당시의 로마정부에서는 ‘열심당’을 반란자, 카이사를 반역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는 ‘역적’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십자가형에 처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를 죽이려는 제사장, 바리새인 등등에게 있어서 제일 좋은 방법은 예수를 ‘열심당’으로 모는 것이었다. 그들은 예수가 ‘열심당’이라는 증거만 총독에게 제공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람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합니다”(누가 23:2) 했고 “우리에게는 카이사 밖에 다른 왕이 없습니다”(요한 19:21, 15) 하고 외쳤다. 그리고 십자가에 붙인 패에도 ‘유대인의 왕’이라고 썼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은 로마였고 유대교권은 그 방조자였다는 것이다. 율법주의자들의 이렇게 메마른 국토 속에서도 민중은 전해 받은 메시아왕국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묵시문학적인 심판형의 최후심판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인자가 메시아 왕국을 건설한다는 하늘의 Drama를 보며 찬란한 묵시문학의 시대를 만들었다. 우리가 소위 ‘외전’이란 책들은 주로 이 중간 시대의 묵시문학적 산물이다.

[III] 메시아 예언의 완성

“하나님께서 옛날에는 우리 조상들에게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에 걸쳐 여러 방법으로 말씀하셨으나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아드님은 하나님께서 만물의 상속자로 정하셨으며 그를 통하여 모든 세상을 지으셨습니다”(히 1:1-2). 예수는 “때가 찼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제는 준비하는 때가 지나가고 완성하는 때가 왔다. 그 완성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사람의 아들인 예수가 오셨는데 그가 곧 메시아다. 신은 그의 인격 자체 안에 증시되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을 정도로 완전한 인간격이었다는 의미에서 참인간이었다. 메시아가 오신다면 이런 완전한 인격 이외에 다시 구할 데가 없을 것이다.

그는 다니엘의 비천에 나타난 ‘人子(인자)같은 이’가 곧 참 ‘메시아’임을 믿었다. 포악한 정복자, 폭군 시산혈해의 살륙전을 수단으로 하는 장군 등등은 ‘인간’이라기보다 맹수형이라고 보았다. 참 메시아는 그런 짐승형이어서는 안될 것이며 오직 ‘참 인간’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 보편왕국을 건설할 왕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진정 인간답고 왕다운 인물이 가져야할 조건은 종되는 일, 섬기는 일, 섬겨서 만언을 대속하는 속량물로 자기 목숨을 바치는 데까지 이르는 그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속량하는 사랑 안에 전인류를 포섭하는 것이 보편왕국의 대현장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의 메시아상을 이사야 53장의 예언에서 보았고 또 그렇게 살고 또 죽었다.

예수는 모든 예언을 완성했다. 메시아 예언은 메시아가 오실 것, 오시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예언한 것이므로 메시아가 오는 그 순간, 예언은 종결되는 것이다. 그리고 메시아의 시대가 시작된다. 그러므로 메시아의 오심을 선포한 세례 요한은 예언 시대의 막을 닫은 마감 사람이다. 예수가 오심으로 그 예언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예수는 또한 율법의 완성자다. 율법은 인간의 죄를 고발한다. 율법이 없으면 선악의 분간이 불분명하고 하나님 앞에서의 도덕적 종교적 책임도 모른다. 그러나 율법이 주어짐으로써 인간은 옳고 그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옳은 것은 행하고 그른 것은 행하지 않아야 한다는 명령과 책임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율법을 그대로 실행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그는 죄의식에 시달린다. 예수는 하나님의 무한대한 사랑을 말하고 그것을 폼으로 실천했다. 예수는 인간의 모든 죄와 벌을 자기 몸으로 담당하여 속죄제물로 그 몸을 드렸다. 그것이 성취된 표적이 부활이다(고전 15:14, 17). 그리하여 예수를 믿는 신앙 안에서 모든 죄과가 해소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만이 감격의 소용돌이를 이룬다. 율법의 고발은 이에서 완결되었다.

예수는 이런 성질의 메시아로서 ‘메시아 왕국’을 땅 위에 세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하는 것이 그의 첫 선언이었다. ‘천국’ 또는 ‘하나님의 나라’는 ‘메시아 왕국’의 별칭이다.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도 그 본성에 있어서는 역사 안에서 지금까지 발전해온 메시아 왕국의 그것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 ① 그 나라는 신정이다. 하나님이 직접 사람의 전존재를 다스린다. 하나님의 영이 인간들 안에 오셔서 그 언간의 뜻과 정과 행동을 감화 주관하신다. ② 그 나라는 보편 왕국이다. 민족, 국가, 문화차이, 사회계층 등등을 초월한 세계적 왕국이다. ③ 그 나라의 현장은 의로운 사랑이다.

그런데 이런 나라를 로마제국이라는 맹수적인 정권 앞에서 현실화하기 위하여는 “지혜는 뱀같이, 순하기는 비둘기같이”(마태 10:16)라는 좌우명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그는 그를 ‘열심당’파로 걸어 넣으려는 숱한 모략을 지혜롭게 피했다. “카이사의 것은 카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마가 12:13-17)같은 것도 그 일례다.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강도요 절도다”(요한 10:8) 한 것은 열심당 두목들을 가리킨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일시적으로는 로마정권을 인정하면서 근본적으로는 하나님 나라, 메시아 왕국을 주장했다. 이 왕국은 예수의 오심과 함께 이루어졌다. 구약의 메시아 예언은 이루어졌다. 예수와 함께 ‘하나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임했다. 그런 의미에서 종말은 현실된 것이다. 그러나 그 보편 왕국으로서의 최후 완성은 끝날에 기대된 다. 그런 의미에서 종말은 미래에의 대망이다. 예수가 오심으로 구약적인 종말이 오고 예수가 다시 오심으로 신구약, 전역사의 종말이 온다. 그 때에 역사는 심판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다. 그것은 그대로 그리스도의 나라다. 그것은 의와 사량이 머무르는 나라, 하나님의 장막이 인간들 가운데 있고 하나님이 친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다시는 사망이 없는 생명의 나라다. 묵시록 21장은 ‘메시아 왕국의 완성을 보는 비젼이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역사 안에서 이 ‘나라’의 완성 과정을 위한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그는 역사 안에서 지금도 일하신다. 교회는 이 ‘하나님의 나라’ 건설의 투쟁에서 하나의 兵站基地(병참기지)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 ‘나라’는 어떤 부분적인 한 구석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정치, 경제, 문화, 도덕, 종교 등등 전생활 부문을 포함한 것이며 그 지역은 전세계다. 모든 인간은 자기가 알든 모르든 이 나라 일에 참예하고 있는 것이다. 악마까지도 Negative한 면에서 이에 참예하고 있다. 우리는 다 ‘메시지’의 동반자요 메시아 왕국의 일군이요 전사다. 끝까지 충성하라.

(이 초고는 1970년 12월 3일 신촌 ‘다락방’에서 모인 기독교 장로회 여전도사 수양회에서 강의한 것인데 청강자들의 요청에 의하여 「제3일」 誌에 수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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