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3일 목요일

[0910] 말씀을 새긴다 (8) : 예수의 인간 치료

말씀을 새긴다 (8)
- 예수의 인간 治療(치료) -


[마태 8:1-4, 5-13, 14-17, 28-34, 9:1-8, 18-26, 27-31, 32-34, 12:9-14, 14:34-36, 15:21-28, 29-31, 17:14-18, 20:29-34]

예수의 생활기록 가운데서 기장 많은 건수를 차지한 것이 병자를 고치신 기록이다. 마태복음에만 해도 상기한 바와 같이 많은 장절을 점령하고 있다. 거기 나오는 병명도 가지각색이어서 나환, 중풍, 사귀들린 병(정신병), 맹인, 벙어리, 혈루증, 간질 등등이 있다. 그리고 죽은 소녀의 희생, 그 밖에도 각양각색의 병자가 고쳐졌다고 통틀어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의 팔레스틴 지방, 특히 빈곤한 유대인 사회에는 의사가 거의 없었고 있다 해도 그 의술이 원시적이어서 의술에 의한 치병이란 거의 불가능했던 것이다. 병원은 물론 없었으며 나환은 특히 천형병이라 하여 종교적으로 불가피에 속하는 不淨(부정)이었다. 나환자, 불구자, 불치병자들은 가정에서까지도 소외된 버림받은 폐물로 되어 있었다.

예수는 이런 비인간화한 인간 군상들 가운데서 그 치료에 몰두했다. 그들의 최대욕구는 몸의 건강이었다. 예수는 거기에 응답한 것 뿐이요, 아무 조건도 사변도 첨부하지 않았다. 선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라든지 영혼을 구원하는 방편으로라든지 하는 부전을 붙인 일은 없었다.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 하는 말씀을 종종 덧붙이기는 했으나 그것은 환자의 수용태세를 정비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특별한 신학적 공식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몸’으로 살아 있는 ‘인간’을 있는 그대로 사랑했다. 그 몸이 병으로 시달리고 허물어지고 그것 때문에 인간이 괴롭고 위축되고 소외되고 천대받는 것이 너무나 마음 아팠다. 그래서 그의 능력을 기울여 치료에 몰두한 것이었다. 고침받은 사람이 감사할 줄 알면 다행한 일이겠지만, 그는 그런 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병이 나아서 건강하게 되고 걷고 보고 듣고 기뻐하는 모습이 기뻤던 것 뿐이다.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의 치료작업을 되새기며 “그는 몸소 우리의 괴로움을 맡으시고, 우리의 병을 짊어지셨다” 하는 이사야의 말씀을 적용시켰다. 그 인간들의 병고를 내가 젊어지고 그들을 건강하게 해주고 싶다는 지극한 인간애의 염원이 그의

치료의 동력이었다는 말이다. 예수가 마치 요술사들이 보자기에서 달갈이며 비둘기며를 맘대로 주물러 내듯이 일종의 초인적 능력을 전시하며 하나님 아들로서의 힘을 과시한 것이라고 선전하는 신자들에 비하면 마태의 예수 이해는 그 깊은 핵심에 도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치료기록에 사귀들린 사람에게서 사귀를 내 쫓았다는 얘기가 여러 번 나온다. 지금으로 말하면 신경성질환 또는 정신병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거품을 물고 폼이 오그라지고 한다는 것은 경련을 일으킨 증세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 당시에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었던 것과 같이 사탄의 존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귀, ‘사탄의 부하들’이 인간의 정선 속에 들어와 인간정신을 착란시킨다는 것은 모두가 믿는 민속 신앙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도 그렇게 믿고 대결한 것이 사실인 것 같다. 어쨌든 예수 앞에서는 사귀가 전적으로 맥을 못췄다는 것만은 명백하다. 正(정) 앞에서 邪(사)가 無力(무력)하고 眞(진)앞에서 요(妖)가 물러가는 것은 정한 이치니만큼 예수 앞에서 사귀가 물러간다는 것은 아무 이상할 것도 없다. 우리 나라 동화에 진술사 앞에서 요술장이가 맥을 못춘다는 내용의 얘기가 많은 것도 같은 진실을 말한 것이다.

우리 나라 초대교회 시대에는 주로 사귀들린 사람을 고쳐준 데서 선교가 시작되었다. 평남북지방에서 혼자서 80여 교회를 세웠다는 고 최봉석 목사님의 선교담을 들어보면 거의 전부가 사귀 내쫓은 사실에 기인된 것이었다. 무속신앙의 전통을 가진 한국인에게는 당연한 얘기라고 생각된다. 지금은 과학의 시대다. 이런 것은 미신이라고 一蹴(일축)할지 모르나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의 영은 심리적 메카니즘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신비한 데가 많다. 아직도 심령의 세계는 거의 미개척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며 따라서 속단불허하는 광대무변한 신비의 세계가 미지로 남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더군다나 근년에 와서는 정신이 육체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신기하다는 것을 의료계에서도 차츰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영역은 아직 극히 초보적인 탐색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와 같이 거룩하고 참되고 순수한 영의 사람이 있다면 그 정신력이 어떻게 위대한 영향력의 인간육체에 미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상식으로도 짐작이 기는 일이며 그것이 우리 눈에는 기적으로 보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예수의 치료봉사는 오늘의 의료사업 의료기관에서 계승했다. 서양에서의 병원 요양소 등의 설치와 그 활동은 주로 그리스도 정신을 체현하려는 동기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치료행위에 나타난 인간애가 크리스찬들 심정에 모험적인 선행의 파문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교회보다도 사회일반 또는 국영사업으로 번져서 치료는 복지사회로서의 당연한 사회적 임무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인간육체를 생리적, 심리적 ‘메카니즘’으로 다루는 것일 때, 그것은 예수의 하시던 일의 한 부분 밖에 계승하지 못한 것으로 된다. 예수는 환자의 인고를 자신이 대신 젊어진다는 인간애의 심정에서 치료에 몰두했다. 그런데 요새는 “병원에 들어가거든 내가 인간이거니 하지 말라” 하는 속담까지 생겼다. 그것은 인간이 무자비하게 실험재료 취급을 받는다는 것을 諷刺(풍자)한 말이다. 물론 의료과학의 정확성과 발전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또는 그것만으로 ‘인간치료’가 완성될 것같이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의사는 환자의 몸의 어느 한 ‘올갠’을 물격으로 다룬다는 것보다도 주격으로 된 인간 자체를 전적으로 다룬다는 존엄성을 살려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의료기관에 종사하는 의사, 간호원, 약사 등등이 다만 과학기술자로서의 직업인일 뿐 아니라 동시에 예수의 제자며 예수의 인간치료 사업 계승자라는 긍지와 의무를 드높여 주었으면 하고 나는 기대한다.

예수는 자기의 인간치료 행적을 자신의 메시아적 ‘심볼’로 여겼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의 메시아격에 대하여 확인하려고 사람을 보내어 “오실 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잖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했을 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맹인이 보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이 복음을 듣는다” 하고 말씀하셨다(마태 11:2-6). 그리고서 “내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고 일종의 경고를 보내셨다. 메시아는 진두에 서서 천군만마를 호령하여 천하를 석권하는 정복자류가 아니라 이렇게 버림받은 인간들을 치료하는 봉사의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과학적인 의술도 없는 그 당시에 있어서 이런 놀라운 치료능력을 발휘한다는 그 자체가 메시아적 표정이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능력은 기적과시를 통한 메시아적 선전을 의도함이 아니라, 그들의 병고를 대신 젊어지는 순천열렬한 인간애의 넘침에서 되는 일임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3일지 제6호 예수의 메시아 의식 참조)

예수에게서와 같이 현대 크리스찬에게 있어서도 의료사업이 단순한 사회사업이라는 것보다도 그것이 이 세상에서 크리스찬으로 사는 하나의 ‘심볼’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 아닐까? 예수의 인간치료가 예수의 메시아격을 표정하는 본질적인 위치에 있었다면 오늘의 의료사업이 크리스찬 신앙과 생활에서 본질적인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도 종교적으로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카톨릭에서는 선교활동에 있어서 교회와 학교와 병원의 삼위가 함께 진출하는 정책을 오래 전부터 실시하고 있다. 교회, 학교, 병원이 삼위일체적으로 인간구원 사업에 협동한다면 예수의 모습은 훨씬 뚜렷하게 부각될 것이며 예수를 증거하는 데도 더 많이 효능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자신이 역사 안에 몸으로 계실 때, 병 고치는 일과 제자 가르치는 일과 복음 선포하는 일과를 함께 행하셨기 때문이다.

교회에는 이른바 ‘신앙치료’라 하여 의료사용을 거부하고 온전히 신앙과 영의 능력으로 병을 고친다는 일파가 있다. 그들에 의하면 의약을 사용하는 것은 불신앙의 소치이므로 신자는 기도에 의한 영령의 역사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약치료는 하나님이 만드신 정상적인 법칙에 의한 것이므로 하나님의 법칙을 순종하는 것이 불신앙일 수는 없다. 의약으로는 절망인 경우에 하나님의 특별한 기적을 탄원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므로 그런 경우에 신앙치료에 의존한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런 경우에 기적이 나타나는 예도 많다. 그러나 하나님이 광야에서 ‘만나’로 먹였다 해서 가나안에 입주해서도 ‘만나’ 만을 바라는 것이 참신앙이고 농사나 목축에 종사하는 것은 불신앙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므로 의약치료를 정상코스로 생각하는 것이 역시 건전한 신앙태도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부흥회 등 집회에서 질병의 기적적 치료를 과대선전하는 것은 유치한 신앙태도라 하겠다. 예수는 죽은 자를 살리기까지 하는 기적을 행했어도 언제나 “선전하지 말라”고 당부했었다. 물론 병치료가 그리스도 신앙에 인연이 될 수는 있다. 또 그렇게 되기를 우리는 바란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 신앙과의 거래 조건이 되어서는 안된다. 신앙은 어떤 경우에서도 강박감의 사용을 기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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