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14일 월요일

[1204] 長空雜記(장공잡기) : 5ㆍ16, 그 날의 한 서울 시민 (1978년)

長空雜記(장공잡기)
5ㆍ16, 그 날의 한 서울 시민


그 후 1주년이 됐다. 그러나 잠잠하다. 나는 수유리 산가(山家)에서 밤새 아무 것도 모르고 잤다. 때는 1961년 5월 16일이었겠지. 지난 17년 전이다. 오늘 새벽에 군사쿠데타가 성공해서 정부기관이 모두 그들 손에 넘어갔다 한다. 아닌게 아니라, 라디오가 그들의 것이 됐다.

그들은 그리 놀라지 않는 것 같았다. “올게” 왔다 하는 표정들이었다.

시내에는 당장 “까십”이 퍼진다.

그는 키가 작고 얼굴이 까마잡잡하고 평정을 잃지 않는 무표정, 무자비한 냉혈의 강철의 사나이라는 얘기었다. 그리고 그는 군대에 있는 청념결백해서 한푼 용돈도 없는 장군이라 했다. 그런데 그게 누군지를 이는 사람은 서울에는 없었다. 얼마 후에사 “박정희”라는 사람의 이름이라고 다들 의아해했다.

얼마 지내면서 김종필 이름이 나타나고 장도영이 국가수반이라면서 군중 앞에 “클로스업”된다. 시내 각처에서 장도영의 일종의 시정연설을 나도 들었는데 그럴 듯한 연설같기도 했다. 헌법을 폐기하고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인들을 체포감금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했다. 그리고 소위 “국가재건최고회의” 란 것은 만들어 십여명 군인이 통치한다. “명령과 복종”이란 기계적인 “질서”가 있을 뿐이었다.

어둠의 아들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속담의 유래는 있지만, “밤”이란, “미녀”가 “영웅”을 만드는 시간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침략에 있어서 야습(夜襲)의 성공률이 높은 것이 사실이겠지만, 어쨌든 박정희의 전략은 거의 전부가 “야습” 불효공격(拂曉攻擊)이었다. 5ㆍ16은 물론이다.

자다가 깬 때는 벌써 역사가 변해버린 뒤였다는 말이다. 밤은 어둡다. 밤에 흉계를 꾸미는 사람은 “어둠의 아들”이다. “밤손님”이란 “도둑”의 별명이 아닌가?

박정희는 좀처럼 국민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자기의 정체는 밤의 장막 속에 감춘다.

5ㆍ16 직후 앞에 나서서 떠들석한 사람은 장도영이었고, 그가 정부수반이라기도 했다. 그러나 10월에 가서 종적없이 사라졌다. 김종필이란 사람이 실권자라고 나섰다. 그러나 또 얼마 후에는 밀려났다. 그렇게 붙였다 뗐다 하는 장본인은 어둠 속에 잠복한 껌정 안경의 두목이란다.

그는 “한국이 위독하기 때문에 응급수술을 할밖에 없다”고 국민에게 선언했다. 응급수술 중에는 가족도 친척도 친구도 얼씬 못한다는 것이다. 집도(執刀)한 자기에게 맡기고 곁방에서 기다리기만 하라는 것이었다. 환자는 놀랍게 나아진다고 한다. 그러나 가족이나 친척에게 돌려주지는 않는다. 어쩌면 “일본”이란 납골당(納骨堂)속에 누워 있는지도 모른다.

박정희란 사람은?

정체불명의 사나이라지만 해외에서 간행된 “인명사전”들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해외 저서들을 들춰보면 아주 모를 사람도 아닌 것 같다.

그는 1917년 9월 30일에 경북 선산(善山) 에서 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1937년에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에서 소학교 교사로 있다가 만주에 가서 만주군관학교를 1942년에 졸업,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유학, 일본군 육군중위로 관동군에 배속됐다고 쓰여 있다.

만주군관학교에 있을 때에는 한국독립군 토벌에 선봉을 섰다는 소문도 있다. 깜찍한 일본군이 “죠센진” 토벌에 “죠센진”을 앞장 세웠으리라는 것쯤은 짐작이 간다.

일본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혈서로 “천황”에게 충성을 서약했다는 얘기도 있다. 허긴, “죠센징”으로서 관동군에 배속됐다면 일본인 이상으로 일본에 충성했으리라는 심증만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1945년 8ㆍ15 해방이 되자 그는 몹시 당황했던 모양이다. 얘기로는 북경을 거쳐 만주로 진격중인 “팔로군”에 끼어볼까 해서 그리고 갔다가 밀려났다 한다. 그는 무작정 서울에 돌아왔다. 마침 이승만 정부에서는 “국군”을 창설한다고,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든 군인으로 있어봤다는 사람이면 무조건 받아 6개월 단기훈련을 거쳐 장교로 임관하는 것이었다. 박정희도 거기 지원, 1946년 2월에 한국육군사관학교 2기생으로 졸업했다.

그는 1948년 10월 여수 순천 좌익반란 사건 때 그 반란에 주동 또는 방관했다는 혐의로 군재에 걸려 사형 구형, 무기언도를 받았었다.

1949년 2월 13일 민정당에서 발표한 여수 순천 반란사건 조사자료에 의하면 “박정희는 그 당시 육군소령으로서 이중엽 남노당 조직책의 지령에 따라, 이재복 군부연락책에 의하여 육군 군부내 공산당 조직을 담당했으며 전 군부내 조직을 통괄한 사람이다"로 되어 있다.

“박정희 소령은 육군사관학교 생도대장(隊長)으로 근무하면서 남노당 세포조직을 담당하였고 후임인 오일근(吳一根) 소령에게 “세포책”을 인계하고 제4연대로 전임했다"고도 쓰여 있다.

그 당시 국방부장관인 이범석 장군으로부터 군부내 공산당 세포 적발 제1차숙군(肅軍)의 명령이 내리자, 박정희소령은 자기 신변이 위험해짐을 알고, 자기를 신임하는 상관인 정보국장 백선엽 중령에게 자수, 자백하고 정보국 소속인 김안일(金安一)소령의 협력을 얻어 불구속 입건이 되었다. 백선엽 정보국장과 그 소속부대인 방첩대(防課隊)가 이 사건의 수사 담당 기관이었는데 김안일 소령은 방첩대장임과 동시에 박정희와는 동기생이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너그럽게 다루어졌던 것이라 한다.

백선엽과 김안일은 박정희의 구명을 위해 그가 갖고 있는 전 군부내의 공산당원 명단을 제공하게 하고서, 박정희는 공산당 숙군에 공로가 크다는 이유로 용서를 상신했다고 한다. 그리고 박정희 소령 없이는 정보부 운영이 곤란하다고 육군수뇌부에 제언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형구형에 무기징역 판결과 직위 파면이라는 그에 대한 선고 사실이 지워지고 국방장관 신성모로부터 복직발령이 내려 정보부에 근속하게 되었다.

박정희 소령이 군부내 공산당원명단을 갖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종신조직(終身組織)이란 볼쉬비기 조직이론상, 그가 공산당원이었다는 것과 당조직책이었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보겠다.

어쨌든, 그 후의 박정희는 정보장교로서의 재능을 발휘하여 상승일로를 달렸다고 말할 수 있겠다.

1950년 7월에 육군본부 정보부 제1과장, 동년 9월에 육군중령, 동년 10월에 제9사단 참모장, 51년 5월에 육군본부 정보국, 작전국, 군수국 등에 근무, 53년에 육군준장으로 승진, 제2군단 포병사령관, 동년 10월에 육군포병학교장 겸 포병감, 56년 3월에 제5사단장, 57년 3월에 육군대학 졸업, 57년 3월에 제6군단 부군단장, 58년 제7사단장, 육군소장, 동년 6월에 제1군 참모장, 59년 2월에 제6관부사령관, 60년 1월에 육군부사령관, 그리고 61년 5월 16일에 군사구태타로 정부를 점령한 것이었다.

이런 그의 경력을 더듬을 때, 우리는 미상불 어리둥절해진다. 일본천황에게 충성서약한 일본장교로서의 Persona, 대한민국에 충성서약한 국군장교로서의 Persona, 국군내 공산당원으로서의 조직책이라는 “빨갱이” 두목으로서의 Persona, 그리고 국군내 공산당동료 명단을 밀고하고 제 목숨을 살린 배신자(?)로서의 Persona, 민주당 정부에 반역하여 정권을 강탈한 “정부 반역자”로서의 Persona, “반공”을 국시라 하며 일인독재를 체제화한 “독재자”로서의 박정희, 너무나 상반되고 잡다한 다양성 때문에 우리는 (1) 그에게서 Personal Integrity를 기대하기 어렵고 한국민족으로서의 정기(正氣)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 (2) 성격조성기에 일본군인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배운 것이 일제말기 “도오죠오”(陳條)군벌독재시대의 일본장교형(型)이어서 “명령과 복종”이란 질서만이 생리화했고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찾는 민주주의 훈련은 거의 없었다는 것, 그리고 한국민족으로서의 민족주의, 애국심 등등도 그의 “혼”으로 뿌리박힐 기회가 거의 없었다는 것, 따라서 자기국민 탄압에는 일제경찰 이상으로 가혹하면서도 일본에 대해서는 심리적으로 저자세가 되어 모든 변에서 당당하지 못하다는 것, (3) 그의 형태로 본다면 무신적, 유물적, 폭력주의적이라는 것, (4) 그는 자기 중심적 권력욕에 철저하기 때문에 그것을 유지 강화하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으리라는 것 (5) 따라서 국민이 자기 집권에 반대하는 때 그는 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전쟁윤리를 감행한다는 것, 그러나 “컴퓨터”적인 작전가라는 점에서 결코 “동키호테”는 아니라는 것, (6) 그에게 주권을 송두리째 뺏긴 국민은 그와의 싸움에서 패전의 쓰라림을 경험하면서도 그에게 충성할 생각은 갖지 않는다는 것, 다시 말해서 Battle에서는 져도 war에서는 이긴다는 자신을 갖고 있다는 것 등등이 세월이 갈수록 표변에 나타나고 있다. 군정초기에 어리둥절하던 판단이 민주운동에의 참여 사건에서 성숙해지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박정권은 아직도 국민적 기반을 갖고 있지 않다는 불안에 떨고 있다. 그 증거는 전국을 경찰 국가화하는 시책에서 스스로 드러난다.

군사정권의 공약과 장기집권

5ㆍ16 군사쿠데타 직후 그들이 발표한 다섯가지 공약은 “반공”, “국제신의 존중”, “부패일소”, “민생고해결”, “통일달성”등등으로서 이승만 정부나 장면정부 때와 별다른 데가 없다. 다만 독재를 강화하여 단시일에 해치운다는 기백이 다르다면 다른 것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제6항에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한 것이 몹시 알송달송하다.

(1) 이상의 모든 파업이 성취되면이란 것이다. “부정부패 일소”, “퇴폐한 국민도의 갱신”, “민족정기 바로잡기” 등등은 단시일에 달성될 수 없는 과제들이다. “백년하청”이란 말과 같이 백년 가도 황하수가 말아지지는 않는다. 이것은 무작정 장기집권을 앙큼하게 암시한 귀절이 아니었을까? 사실 박정희는 민정으로 옮길 때, 자기가 다시 대통령으로 출마한다고 선언했다. 그때 그 이유로서 “내가 군정에서 시작한 과업이 아직 다 달성되지 않았기 때문에”라고 했고 “전진을 중단할 수 없어서”하고 거듭거듭 구실을 붙였다. “민생고 해결”이란 것도 유토피아가 실현되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빈곤은 계속 있을 것이다. “통일 달성”이란 것도 워낙 국제관계, 특히 강대국들의 얽힌 이해관계에서 생긴 분단이기 때문에 언제 그것이 풀릴지 예측할 수 없다. 역시 장기집권의 포석이라 하겠다. 말하자면 자기집권 중에 통일을 이룬다는 것이니 통일이 될 때까지는 안 나간다는 말이 된다.

가령 위엣 조건들이 다 이루어졌다 셈치더라도 그 때에는 곧 정권을 내놓는다는 말이 아니다.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란 조건부 이양이다. “양심적”이란 것은 누구의 어떤 가치기준에서 말하는 내용의 “양심”인지, “참신”이란 것은 어떠한 의미에서의 “새것”인지, “유신”, “새마을”, 따위 “참신”인지 알 바가 없다. 그러니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란 말은 있으나마나한 공문서고 그 시기도 “언제든지”여서 그야말로 “무작정”이다.

그리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는 것도 애매한 연막이다.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할 준비를 갖춘다"는 것이다. “준비가 아직 덜 됐다”는 구실로서는 끌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평화리 정권교체는 “안한다”는 선포였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국민들은 가슴 속에 감춘 비수(자객이 쓰는 칼)를 미처 간파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싶어진다.

이제는 연막이 걷히고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고발”의 시대다.

댓글 1개:

  1. 박정희라는 인물은 아직도 어느 지역에서는 '거의 신격화'된 존재이다.

    그것이 진정 대한민국을 올바른 방향에서 업그레이드 시킨 지도자인지... 아니면 개발독재라는 과정을 통해서 수많은 어두운 면이 감춰져 있고... 솔직히 그 어두운 면이 그 이후의 역사를 통해서 '적폐'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도사리고 있는지에 대해 역사적으로 명확한 평가를 해야할 것이다.

    인간 박정희에 대한 다양한 면을 우리는 간과하고 오로지 '경제성장'이라는 면에서만 바라보려고 했다는 점에서 너무 편협한 시각을 갖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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