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7일 금요일

[0902] 八福(팔복)에의 想念(상념) (2)

八福(팔복)에의 想念(상념)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함을 받을 것이다.」 - 여기서 「애통하는」는 헬라어 「펜테인」 - Penthountes은 보통 슬퍼한다는 정도를 넘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격렬한 슬픔을 의미한다. 감상적인 애상(哀傷)이 아니라 애곡, 또는 통곡하는 슬픔인 것이다. 이렇게까지 심한 슬픔을 가진 자가 복되다는 것은 납득이 잘 안갈 것이다. 특히 현대인은 하루를 살든 백년을 살든 이 세상을 즐기며 살지는 생활 철학을 놓치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강산을 더 아름답게 꾸미면서 하나님의 자녀가 즐겁게 아름답게 사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 하는 것이다. 개인도 사회도 명랑해야 한다. 음울하면 그만큼 생활을 그늘지게 한다. 남을 즐겁게 하는 것이 곧 선이요, 슬프케 하는 것은 사회적인 범죄라고까지 말한다. 그래서 경쾌한 노래, 즐겁기만 한 춤추기가 유행한다. 심리학이 발달되면서부터 이 경향은 더욱 뚜렷해졌다. 완숙한 인격자란 것은 유쾌해야 하고, 재미있어야 하고, 점잖은 농담으로 사람들을 잘 웃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이만 나타나면 모두들 인간양지(人間陽地)를 발견한 밝음에 마음이 뛰노는, 그런 사람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으니 이건 너무나 심한 비현대적 사고방식이 아닌가?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다시 생각해 보자! 사람이 즐겁게 사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이란 즐겁기만 한 것이 아니며 즐겁기만 해서도 안된다. 사시사철 해만 쪼이면 땅이 메말라 사막이 된다. 사람의 삶에는 슬픔도 있는 것이며 또 있어야 한다. 슬픔에서 사람들은 반성도 하고 사람을 위한 눈물도 알고 또 바른 길을 찾아 비약도 한다. 요는 바르게 즐기고 바르게 슬퍼하는 인간이어야 하며, 바르게 즐기기 위하여는 바르게 슬퍼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인간의 길인 것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구절을 더 단순하게 말했다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6:21) 한 것이다. 피압박 민족, 사회의 밑바닥에 깔려 무진 짓밟히는 영세민 등에 대한 종말왕국의 약속이 반짝이고 있다(눅 16:25). 우는 자에게 웃음을 주는 것이 「기쁜 소식」일진대 우는 그 자체가 덕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고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묵 21:4)한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하여는 그 약속에의 길을 막는 즐거움을 슬퍼하는 슬픔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건대, 현대인의 즐거움이란 거의 전부가 감각적인 즐거움이다. 잘먹고, 잘 입고, 편히 살고, 눈과 귀에 아름다움을 제공하고, 이성(異性)과의 즐거움을 맘껏 누리자는 등등의 욕구가 거의 전부다. 그러나 이런 즐거움이 인간성을 얼마나 드높여 주느냐가 문제다. 이런 것은 짐승들도 다 갖는 영역이다. 인간도 동물인 이상 이런 것을 즐기는 것이 죄가 될 리는 없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동물적인 것을 초월한 「인간」으로서의 다른 영역이 있다. 이 다른 영역이 사실인 즉,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특수세계인 것이다. 인간이 심미(審美)의 세계에서 「도덕」의 세계에 상승하는 순간, 그는 비로소 인간에게만 주어진 어떤 인간도(人間道)를 걸어야 할 엄숙한 의무를 느끼게 되는 것이며, 그 의무를 위하여는 덮어놓고 즐겁게 지낼 것이 아니라 때로는 단연 즐거움을 배격하고 슬픔을 택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율법이 들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이 죄가 무언가 몰랐기 때문에 덮어놓고 즐거울 수 있었다. 그러나 율법이 들어온 다음에는 죄가 무엇임을 알았기 때문에 걱정이 생기고 죄에는 죽고 의에는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그 반대되는 길을 걷게 되는 자아현실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슬픔을 인간으로서의 바른 슬픔이라고 한다. 심미적인 세계에서 느끼는 자연감정적인 슬픔보다는 훨씬 높은 딴 차원에서의 슬픔인 까닭이다.

그런데 자연감정적인 슬픔이든 도덕적 의무감에서의 슬픔이든 간에 슬픔 그 자체는 덕이 못된다. 오히려 인간을 괴로움으로 녹여 없애는 구실 밖에 못한다. 그러나 인간이 이런 슬픔에서 낯을 돌이켜 하늘을 보고, 진지하게 하나님의 구원을 호소할 때,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이 응답하는 것이다 「나는 즐겁기만 하다」는 자기 포만에서는 그런 호소가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응답도 물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로서의 인간 비참을 절감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애타게 슬퍼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응답하신다. 「네가 위로함을 받을 것이다」하는 그것이다. 「위로한다」는 헬라어 「파라클레인」의 피동형이다. 이 글자는 고전 헬라어에는 나오지 않는 글자라 한다.

하여튼 「위로한다」는 뜻일 것임에는 틀림없다. 범죄와 비참을 있는 그대로 안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때 하나님의 응답은 다만 벌을 집행하지 않는다든지, 죄를 폭로시키지 않고 덮어 두겠다든지, 용서는 하지만 다시 또 범죄하면 그 때에는 용서가 없으리라 든지 하는 등등, 어떤 꼬리표 달린 응답이 아니다. 온전히 용서하고 온전히 잊어버리는 은총을 전제로 한 「위로」다. 「내 원수 앞에 상을 베푸시고 기름진 내 머리에 부우시니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하는 과분한 즐거움으로 대접해 주시는 위로며, 등경 위에 높이 올려 온 방안을 비취는 등불같이 뭇사람을 격려하며 계몽하는 위치에까지 서 주시는 「위로」다.

인간으로서의 당위(當爲)를 생각할 사이도 없이 육적인 향락만을 추구하는 현대인에게 이 말씀이 시대착오적일까? 오히려 더 높이, 또 더 깊이 일러줘야 할 말씀이 아니겠는가? 부자와 거지 나사로와의 대조가 현대인에게 적용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이미 이 넘치는 위로와 은혜에 참예한 자, 슬픔에서 기쁨에 옮긴 자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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