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7일 금요일

[0902] 八福(팔복)에의 想念(상념) (3)

八福(팔복)에의 想念(상념) (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임이니라」(마 5:5) 했다. 「온유한 자들」이라고 번역한 헬라어는 「프라에이스」며 「프라우스」의 복수형인데 이것은 구약성서에서 자주 나오는 히브리어 「아나우」를 번역한 것이다.구약에서 「아나우」는 「아나아」라는 동사에서 나왔다. 「아나아」는 무릎을 꿇다, 머리를 숙인다, 짓밟힌다 등등을 의미한다. 이것이 겸손, 유약 등으로 번져서 「온유」, 「겸손」으로 되었다. 빈곤하고 약해서 권세자에게 눌리우고 부자에게 빨리우는 인간들을 의미한 것이었는데 그것이 차츰 정신적인 미덕인 「온유」, 「겸손」으로 승화했다고 할까! 그런데 구약에서는 흔히 미천한 농민층과 관련되어 있다. 아모스 2장 7절에 있는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한다」한 구절에 「겸손한 자들」이란 히브리어 「아나임」은 부자에게 착취당하는 빈농층을 의미한다. 공의의 하나님은 이런 미약한, 고난받는 백성에게 긍휼과 사랑을 더 많이 베푸신다. 그들은 사람에게 압박 당할수록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호소하고 구원을 갈망한다. 그러므로 오히려 그런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기회는 더 많이 제공된다. 따라서 「겸손」이란 말은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 관계에서 이해되어 있다. 겸손한 사람은 인간 교만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서 그의 말씀을 듣고 그에게 순종하며 그의 약속에서 희망을 밝히고 그의 위로에서 힘을 얻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헬라에서의 「프라우스」는 아리스토틀의 이른바 「중도」(中庸之道)의 사람을 의미한다. 과하지도 않고 미급하지도 않은 사람, 만용을 부리지 않음과 동시에 비겁하지도 않은 사람, 행동은 민활해도 마음은 고요하며, 겉은 보드러워도 속은 강철같은 사람을 의미했다. 약하다 해도 힘이 없어 약한 것이 아니며, 공세를 취하지 않아도 무서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온유한 자」란 것은 하나님을 순종하고 사람에게 겸손하나 스스로는 뚜렷한 사람, 바른 각오와 강한 힘이 그의 성격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사랑과 지혜로 자기를 길들인 사람을 의미한다 하겠다.

다시 생각해 보자! 지금의 사람들로서 이런 덕을 이해할 수 있을까? 「힘이 제일이다」하여 무기를 쌓아 올리며, 원자탄을 자랑하고, 돈을 벌어 곡간에 채우고서 「자, 이제 먹고 마시며 즐기자!」하는 인간들이 어떻게 겸손이니 온유니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인가? 그건 약자의 비명같이 너절하게 보일 것이다. 시시한 놈들을 보면서도 때려부수지 못하고, 못된 놈들 앞에서 비실비실 피하고, 국난에 임해서도 칼을 들 줄 모르며 뼈 없는 벌레처럼 그늘진 데서 꾸물대는 그런 못난 인간이라고 경멸하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그래서 따스한 것 대신에 냉철하고, 부드러움 대신에 무시무시한 인간이 판을 친다. 그러나 진실로 위대한 사람은 이 둘을 한 인격 안에 조화시킨 사람일 것이다. 참으로 냉철한 바 있기에 따스할 여유가 생기는 것이요, 참으로 무시무시한 힘이 있기에 보드러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그리스도 자신의 성격과 생활에서 본다.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죄인의 종이 되시고, 천군 천사를 불러내릴 능력이 있으면서 말없이 죽음에 오르셨다. 저주를 축복으로 대답하고, 박해를 감사로 견디며, 미움을 사랑으로 메우고, 원수를 친구로 대하는 마음과 생활은 진실로 위대한 인간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온유한 자」란 이런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에게 땅이 주어진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자고로 땅은 강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래서 땅을 차지하려면 칼을 들고 천군 만마를 호령하는 정복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억만장자에게만 넓은 땅이 굴러드는 것이었다. 제국의 판도를 넓히려면 그만큼 많은 인간이 죽어야 했다. 온유한 자들은 그 땅에 붙은 종들이요 그 땅의 주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의는 따로 있다. 그는 칼로 정복한 땅의 임자들을 역사의 두루마리에서 털어 버리신다. 그래서 숱한 영웅들이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온유한 자들에게 땅을 주시마 약속하신다. 히브리 사림들이 부르는 소위 「암 하아레즈」, 「땅의 백성」이라는 가난하고 천대받던 천농들에게 땅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심판은 역시 이 방향으로 나타난다. 「땅은 농민에게」라는 표어는 이제 세계적인 시장방향으로 되어 간다. 원시시대에는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공룡」같은 따위 짐승들이 판을 쳤다. 그러나 그건 한 때 그러했을 뿐, 땅은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멸종되고 그 밖에도 남을 잡아먹고 사는 맹수들은 제대로 번식하지 못한다. 수천 수만 마리의 사슴을 무리에서 한두 마리 잡아먹을 수 있어도 그렇다고 맹수가 주인인 것은 아니다. 온유한 짐승들의 불어나는 수를 당해 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계에 있어서도 땅은 역시 온유한 자의 것이라 하겠다. 인간의 세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강자의 침략과 정복은 지나간 얘기다. 이제부터는 맘성 좋고 뜻이 바르고 이웃 나라를 돕고 딴 나라의 곤고를 나눠지는 그런 나라, 그런 민족에게 인간 역사는 주어진다.

종래의 인간 역사는 폭력과 이기주의의 방향으로 돌아갔었으나 그것을 반대 방향으로 돌리려고 그 역사의 바퀴에 매달려 죽은 이가 그리스도다. 그의 죽음은 멸시를 받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죽음을 그 돌아가는 바퀴에서 팽개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점점 더 무거워진다. 그래서 역사의 바퀴는 결국 그의 편으로 역전할 운명에 있다. 슈바이쳐가 이런 얘기를 했다지만, 현존 역사에 그렇게 되든 안되든, 하나님의 뜻은 역시 그러하시다. 종말에는 그렇게 되고야 말 것이다.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 만주의 주시라면, 그리고 그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주어졌다면, 이치로 볼지라도 그런 온유하신 사랑의 통치자가 땅을 다스려야 할 것이 분명하다면, 그의 안에서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리라」는 말씀은 그대로 지금을 위한 말씀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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