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7일 금요일

[0902] 八福(팔복)에의 想念(상념) (4)

八福(팔복)에의 想念(상념)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지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 중에서 「주린다」는 경험은 우리 한국 사람으로서는 그 질감이 어떤 것임을 잘 알 수 있다. 나는 젊었을 때 무일푼의 서생으로 이국의 인간 광야에 버려졌던 시절을 회상한다. 배고프다는 것은 비참하다. 깨어서는 참을 수 없어 일부러 눕는다. 잠이 들어 괴로움을 잊자는 것이다. 그러나, 오래 잘 수도 없다. 모든 상념이 사라지고 다만 먹을 것만이 눈 앞에 어른거린다. 내게 보리밥과 된장찌개를 먹여 준다면 나는 평생 그 사람의 종이 되어 일해도 불평이 없겠다고 속에서 부르짖는다. 인간이 원 그럴 수 있느냐고 해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세네카를 읽고 마커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되새긴다.

싸움은 여기에 있다. 내가 먹는다는 것이 내 인간됨을 팔 수는 없다. 돈에 항복하고 돈을 벌거나 먹을 것에 굴복하고 먹을 것을 얻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젊어지고 네게 항거한다고 반격해 본다. 그래서, 생쌀 한 줌에 냉수를 마시며 승자처럼 도도하게 걸어본다. 그러나, 배고픔의 비참함은 물러가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의 이동은 먹을 것을 쫓아다닌 기록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목마르다」는 경험은 가는 곳마다 맑은 샘이 솟아 손으로 움켜 마쳐도 탈나는 일이 없는 우리 나라에서는 그리 심각한 것이 못된다. 이것은 사막의 사람들이 느끼는 갈증이다. 그런데 선민인 유대인은 배고프고 목마른 경험을 둘 다 그 밑바닥에서 느끼고 산 사람들이었다. 예수님도 그것을 잘 알고 계셨다. 그 애타는 욕구! 그것이 먹을 것과 마실 것에서 의에로 전향한다면 인간성이 높아짐과 그 빛남이 어떠할 것인가? 그러나, 이런 얘기는 현대 부요사회에서는 외국어 같이 들릴 것이다. 「잘 먹고 잘 입고 편히 살고 즐길 수 있는 대로 즐기자! 고생은 그대로 악이라」고 말하는 현대인에게는 「주리고 목마르다」는 경험이 의미 있게 느껴질 까닭이 없다. 이런 부요 사회에 미처 가지 못한 소위 후진국에서는 아직도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 수두룩하긴 하다. 그러나, 그들도 거기에 무슨 의미를 느끼려 하지는 않는다. 우리도 「잘 살아야 하겠다.」, 「어서 속히 우리도 이런 생활에서 벗어나 잘 먹고 잘 입고 편히 살아야 하겠다」는 일념에서 광분하는 것 뿐이다. 의를 향한 비약 같은 데는 상념이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에게는 인간되는 바탕이 있다. 또 하나의 높은 차원이 있다. 이 차원을 상실한 인간은 이른바 「인면 수심」(人面獸心) 이어서 「편한 개팔자」밖에 못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귀절 말씀은 여전히 근본에서부터 인간에게 도전하는 선언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의」란 말은 우리 귀에 익숙한 헬라어 「디카이오수네」이다. 이것은 개인으로도 바르게 살고 사회적으로도 공의가 전체에 배어든 공동사회가 되고 하나님 앞에서도 떳떳하게 설 수 있는 경지를 의미한다. 우리가 배고플 때 먹을 것을 구하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찾는 것과 같은 갈급한 심정으로 이 「의」를 갈구한다면 인간 역사는 오래지 않아 변혁될 것이다. 이 간절한 요구를 주님께서 인용한 것은 그가 의미하는 「의」가 적당한 타협이나 비교적 나은 중간율적인 것이 아님을 나타냄이라 하겠다. 여기서 그가 요구하는 것은 전부냐, 그렇잖으면 전무냐 하는 태도이다. 그 절대적인 의를 전 심신을 남김없이 드려, 오직 그것만을 추구하라는 뜻이다. 「이것과 저것」이 아니라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우리 앞에 내던져 비장한 결단을 촉구하는 태도이다 「나도 그리스도에게 흥미를 느낀다」는 정도가 아니라 「나는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의 것이다」하는 고백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극도로 배고픈 사람이 먹지 못하면 죽는다. 그에게는 살고 죽는 것이 「먹을 것」에 달려 있다. 그와 같이 「의」가 없다면 나는 죽는다. 「의」가 나의 생과 사를 결정한다는 절대 절명의 마음을 주께서는 요구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바아클레이 목사도 지적했듯이 그가 우리에게 절대로 의롭게 되라고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의롭게 되기를 안티깝게 구하라는 것이었다. 얻지 못해도 구하는 그 심정을 주께서는 요청하신다. 이 거룩한 욕구가 문제이다. 세상살이에서도 사람이 가난해도 돈을 벌어 잘 살아 보겠다는 욕구를 갖고 있는 한 그는 빈민이 아니다. 진짜 빈민은 잘 살아 보려는 욕구 자체를 상실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잘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없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욕구도 없다. 그런 사람은 구제할 길은 없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의에 대한 욕구, 그 불타는 욕구를 청하고 계신다. 구하는 것 그 자체가 축복이란 말이다. 구하는 것은 우리의 할 일이다. 그러나, 구하는 데 대한 응답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의」란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데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되어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믿는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의 공로로 용서하시고 우리를 의인과 같이 대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의는 하나님이 우리를 의로 선언하셨기 때문에 성립되는 하나님 관계에서의 「의」라는 것이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느라고 아무리 애써도 그것으로 의롭게 될 수는 없다. 모든 율법을 향상 온전히 지키지 못하면 그는 율법을 지킨 자가 못되기 때문이다. 십계명에서 다른 아홉 계명은 다 잘 지켰다 할지라도 그 중 하나를 못지키면 십계명 전체를 못지킨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의를 사모한다 할지라도 율법을 통하여 의롭게 될 수는 없다. 율법을 비판하신 예수께서도 그런 것을 우리에게 기대하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너희가 「배부를 것이다」하는 약속을 주셨다. 배부를 것이라는 헬라어 「코스타스데손타이」는 채워진다는 뜻, 민간 속어로서 짐승을 속히 살찌게 하기 위해 잘 먹이는 것을 의미한 것이었으나, 후에 만족하게 포만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고 한다. 의를 죽도록 사모하는 사람이 들에서 굶어 죽고 광야에서 말라 죽는 신세를 변하고 진실로 의로 포만하게 된다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교의 대속과 믿는 자에게 값없이 선포하는 의 - 그리스도의 의가 믿는 모든 사람의 의로 되는 거기에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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