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7일 금요일

[0902] 八福(팔복)에의 想念(상념) (5)

八福(팔복)에의 想念(상념) (5)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긍휼」(矜恤)이란 말은 한문적인 우리 말이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 「차마 못하는 심정」(不忍之心), 나를 다른 사람에게 일치시켜서 그 사람의 경우를 느끼는 마음이라 하겠다. 헬라어의 「엘레오스」에서 복수로 「호이 엘레 이모네스」로 기록되어 있다. 영어에서는 흔히 ‘Mercy’, ‘Merciful’로 번역한다. 신약에서 27회 나온다고 했다. 이 말이 히브리어의 「헷세드」(Chesedh)를 번역한 것임에는 틀림 없을 것이며 구약에서 이 「헷세드」란 말이 얼마나 중요하고 위대하는 것은 성경을 읽는 사람으로서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구약에서 150회 이상 나오는 단어다. 히브리인은 여호와 하나님과 계약에 들어간 서민이므로 그 계약을 지키지 못한 경우에 계약에 있는 대로 벌받아 멸망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선민으로 하나님의 약속 아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 불쌍히 여기는 자비심, 「헷세드」 때문이란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는 이 말의 십분지 구는 하나님의 마음과 그 행동을 표현하는 데 쓰여진 것이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이런 하나님의 심정을 우리 하나 하나가 내 마음으로 가지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동양에서 석가모니의 「대자대비」라든지 공자님의 「인」(仁)이라든지가 다 이에 통하는 덕임에는 틀림 없다. 불교에서는 「나」라는 실존 아닌 환각에서 떠나, 내 욕심을 버린 무아(無我), 해탈(解脫)의 경지에서 행하는 일이 「자비」로 나타난다는 철학적인 밑바닥을 갖고 있다. 공자님의 「인」은 사랑의 이치요, 마음의 덕(愛之理, 心之德)이라서 결국 모든 윤리 생활의 근본임과 동시에 그 완성인 덕목이다. 이것은 윤리를 바탕으로 한 것임이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긍휼, 자비, 혹은 불쌍히 여김은 직접 하나님의 심정을 우리에게 나누시는 것이어서 그 근본부터 종교적이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니 너희도 사랑하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형체화하여 우리에게 나타났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가 비로소 사랑을 알았다」고 제자들은 증언한다. 「그러므로 우리도 서로 사랑하자」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사랑에 접했으니 만큼 우리가 긍휼이니 불쌍히 여기느니 하는 사랑의 심정을 입으로 만이라도 으례 그럴 것 같이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가르치실 그 무렵의 인간들이란 이런 것과는 인연이 너무나 먼 처지에 있었다. 이 자비심,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다는 부드러운, 불쌍히 여기는 마음씨 - 이런 것은 유대인에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율법 조문을 「인간」보다 더 높여서 마치 인간이 안식일 또는 그 밖에 모든 율법을 위해 있는 것 같이 율법을 가지고 인간을 괴롭히고 있었다. 남자가 제멋대로 자기 아내와 이혼하여 「이혼 당한 자」라는 증서 밖에는 아무 가진 것 없이 거리를 헤매게 하는 습관, 음행한 여자라고 숱한 인간들이 끌고 거리에 나와 「돌로 죽일까요?」하고 예수님에게 묻던 무자비하고 뻔뻔스러운 인간들, 성전에 이방인을 데리고 왔다는 소문 때문에 바울을 돌로 때려 죽이려 들던 인간들 - 이방인인 총독도 차마 못하겠다는데, 소위 서민의 지도자라는 제사장, 바리새파 사람들, 학자들, 그리고 군중까지도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고함을 지른 그 인정머리 없는 인간들, 스데반을 산 채로 돌로 때려 죽이면서 장한 일이나 하는 것 같이 좋아하던 인간, 그런 것이 그 당시의 유대인이었다. 거기에 무슨 「자비심」이 있다고 할 것인가? 교회도 율법주의에 빠지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 우리 자신들까지도 경험한 사실이다. 긍휼할 줄 안다는 것은 한국 교인으로서의 중대한 과제다.

예수님 당시의 이방인들도 긍휼과는 거리가 멀었다. 종을 마음대로 혹사하고 죽이는 것, 인간을 맹수와 싸우게 해서 맹수에게 찢겨 피비린내가 대지에 풍기면 그걸 보고 손뼉치는 인간들, 갓난 애기를 그 어미 아비가 눌러 죽이고, 산 채로 길가에 버리고 물에 집어넣으면서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없을 뿐더러 으례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인간들(아리스토틀), 약한 아이나 불구가 된 아이는 미친 개 때려 죽이는 것과 같이 처리해 버려야 한다고 가르친 유명한 사상가 세네카(憤怒論 1, 15, 2), 그러나 지금도 이 비슷한 잔인한 일들이 아프리카 뿐 아니라 소위 선진국에서까지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 「아프리카여 안녕」이란 영화에서 만이 아니다. 공산당들의 의식적인 무자비 행위 - 못을 머리에 박아 죽이고 눈을 산 채로 뽑고 산 사람을 지지고 묶고 하는 그들의 악독한 마음이 지금도 그들에게 교조화하고 있다. 교회사에서는 어떠한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긍휼과 자비를 믿고 가르친다는 교직자들이 제 형제인 교인을 장착 위에 산 채로 세우고 불을 질러 그 타죽는 광경을 보면서 좋아하던 마음 뽐새들, 신교도(유게노)들을 갑자기 습격하여 한꺼번에 수천 명을 학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감사의 미사를 드리던 마음 - 그것이 긍휼을 아는 마음이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조직체로서의 종교 왕국에 충성한다는 것과 예수의 마음을 가진다는 것과는 일치되는 것이 아닐 뿐더러 온전히 반대되는 일도 없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다 아는 말도 아니요 지나간 말도, 쓸 데 없는 말도 아니다. 지금 이 기계화한 인간들, 냉혹한 조직체의 부분품으로서의 인간들에게 더욱 새롭게 일러 주시는 말씀이다. 이제 우리는 누가 억울하게 죽었다, 한집 식구가 생활고 때문에 집단 자살을 했다 해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안날 정도로 목석같이 되가고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이 이해타산으로 결정되는 사회에서 그래도 인정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교회에서 찾아야 될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이것이 크리스찬이라면, 그리하여 우리가 냉혹한 사회에서도 인정을 모험할 수 있다면 그것은 결코 언제까지나 반응없는 「광야의 소리」로만 그칠 것이 아니다. 주님 말씀이 이를 약속하신다.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사람은 긍휼히 여기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도 그렇게까지 비인간으로 오래 계속될 수는 없는 것이다. 누구나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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