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27일 금요일

[0902] 八福(팔복)에의 想念(상념) (8)

八福(팔복)에의 想念(상념) (8)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상이 크다.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역사에 윤리를 싹트게 히는 생산의 고통이라 하겠다. 불의하고 부패한 자가 집권하고 있는 가운데서 의를 말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그대로가 집권자를 공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부정하고 부패했다 할지라도 그들 양섬은 그 깊은 밑바닥에서 그들을 책망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는 불안한 것이다.

그런데도 어떤 의로운 사람이 좌우에 날선 칼로 그 양심을 찌른다면 그는 더욱 불안하고 격동되어 그 가진 권력으로 이에 대결하려 들 것이다. 그래서 그는 칼로 의를 대항한다. 의인은 칼 앞에 의를 던진다. 칼은 미친듯이 그 의의 몸을 찢는다. 그러나 그 칼이 의 자체를 버릴 수는 없다. 몸의 폭발로 그 의는 더욱 큰 세력으로 부활한다. 그래서 역사 전체에 참된 것, 아름다운 것, 선한 것이 싹터 자라는 것이다. 이 패역한 세대에서 참과 아름다움과 선함이 조금씩이라도 자란다면 그것은 의인의 피를 마시고 자란 것이라 하겠다. 자기가 범죄하고 괴롬 당하는 것은 보복이나 형벌이겠지만 「의」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면 그것은 여기서 말한 「핍박」이며 그것은 바른 역사의 생산고며 하늘 나라에서의 영예며 그 이름이 영원에 기록되는 축복된 것이다. 하늘나라란 그이들의 것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옛날부터 「의」를 말하고 목숨을 날린 예언자들이 다 이 계열의 선배들이라고 했다.

이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있어서는 「의를 위하여」가 「그리스도를 인하여」로 바꾸어졌다. 「의」라는 추상명사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라는 인격에 대한 충성의 시험으로 「핍박」이 다가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선한 것, 아름다운 것, 참된 것, 의로운 것들이 그리스도 예수라는 인물에, 몸을 이루어 있기 때문이다. 옛날 예언자들도 다 종교인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말한 「의」도 하나님 자신의 품격과 그 계시에서 주어지고 틀려진 「말씀」의 내용으로서의 「의」였던 것이다. 유교에서 「仁義禮智(인의예지)」를 말할 때에도 그것은 「天道之常(천도지상)」이라 하여 하늘의 도가 원래 그런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가 구약의 구원 약속, 헬라의 「로고스」 유교의 「천도」 등이 몸으로 되어 역사 안에 나타난 분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그에게 충성하는 것이 곧 지상선에서의 충성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는 최악의 역사 속에 탄생하여 30세까지는 이름 없는 정직한 기술노동자로 가족을 부양하며 지냈다. 30이 되어 그는 만민구원의 대원을 세우고 「하나님 아들」로서의 공생애에 들어갔다. 그는 「하나님의 의와 그의 나라」를 선포하면서 「머리 둘 곳도 없는」 방랑선교자로 삼년을 지냈다. 그는 병자들을 고치며 제지를 가르치며 천국 복음을 선교하였다. 그러나 악한 세대의 불의한 집권자들은 그의 의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는 공생애 3년째에 잡혀 가장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을 당했다. 그는 가장 참혹한 수난자며 가장 위대한 승리자였다.

「제자가 선생보다 낫지 못하고 종이 상전보다 높지 못하니 제자가 선생 같고 종이 상전 같으면 족한 줄 알라」하고 그는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인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 해도 그리스도 자신이 핍박 받은 것보다 더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선생인 그리스도만한 수난을 각오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스도가 온전히 무죄한 분으로서 그렇게 핍박도 참아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스도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그렇게 죽으셨다면 그의 죽으심으로 산 우리가 「그 의」를 인하여, 그이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핍박받고 억울함을 당한다는 것은 오히려 영광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래서 야곱은 첫 순교자로, 스데반은 다음으로 순교했다. 그리고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 바울은 목베어져 순교했다. 그리고 무수한 신자가 불의한 집권자의 손에 순교했다.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는 것과 「순교」 한다는 것과는 같은 “martus” 란 헬라말로 표시되었다. 초대 3세기 동안의 로마제국과의 대결에서 피로 증거한 무수한 순교자, 중세기 카톨릭 - 프로테스탄트 대결에서 후자가 당한 무수한 순교자 그리고 근년에 공산국가 안에서 이 구실 저 구실로 숙청 당한 무수한 수난자 - 이런 이들이 피로 심은 씨가 새 역사를 탄생시키며 하늘나라가 이 땅에서 바라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핍박은 없어야 할 것이 있어온 것이다. 인간이 지성적으로 성숙하고 사회적으로 원만하다면 「핍박」이 있을 수가 없다. 그리고 핍박은 스스로를 상대방에 너무 심하게 대립시키고 분리시키는 데서 피차 교류의 길이 막힘과 동시에 오해가 쌓이고 증오가 조장되어서 생겨나는 것이다. 그것은 초대교회 대 로마제국 관계에서도 그러했고 중세기 대 로마 가톨릭교회 관계와 근대 대 공산당 관계에서도 그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피차 대화와 교류를 힘쓰고 이해와 아량으로 접촉하여 사랑안에서 서로 위하는 태세를 취하는 것이 더욱 어른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오늘의 깨달음이다. 이 「대화」의 신학은 최근에 생긴 것이나 오늘 이후 그리스도인의 「세계」를 향한 태도를 일변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를 위하여, 그리고 그리스도를 언하여 핍박 받는 것을 겁내거나 부끄러워할 것은 없으나, 불건전한 「피해의식」을 영광으로 여기는 치졸은 언제나 삼가야 할 것이라 믿는다. 우리가 대화와 이해를 위하여 최선을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닥쳐오는 핍박은 하늘에서의 위대한 상을 우리에게 약속해 주는 축복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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